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미얀마의 로힝야족 탄압… 英 식민 지배가 낳은 비극

입력 : 2017.09.14 03:12

[미얀마 '인종 청소' 논란]

영국, 1885년 미얀마 분할통치 시작
다수 차지하던 버마족은 탄압하고 로힝야족 데려와 지배층으로 등용
종교·경제 갈등 생기며 적대감 커져
독립 후엔 미얀마의 '보복' 탄압 시작… 아웅산 수지 집권 후 더 악화됐어요

미얀마 라카인주(州)에서 벌어진 미얀마 정부군과 소수민족 로힝야족 간 유혈 충돌을 둘러싸고 국제사회의 우려가 점점 깊어지고 있어요. 이번 유혈 충돌은 지난해 10월 미얀마 정부에 반대하는 로힝야족 반군(叛軍)이 미얀마 국경지대 초소를 습격하고, 지난달 25일 또다시 반군이 라카인주 경찰서 30곳을 공격하면서 불거진 건데요. 정부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현재까지 로힝야족 400명 이상이 사망하고 30만명이 이웃 나라 방글라데시로 탈출했다고 해요. 반군이 다음 달 10일까지 일시 휴전(休戰)을 선언했지만 정부군은 이를 거부한 상태예요. 유엔(UN)은 "미얀마의 로힝야족 탄압은 인종 청소의 교과서적 사례"라며 13일 긴급 안전보장이사회를 열 예정이죠. 미얀마 정부와 로힝야족은 왜 이런 유혈 충돌을 빚고 있는 걸까요?

◇영국이 뿌린 분쟁의 씨앗

미얀마는 대표적인 소승불교 국가로 미얀마 국민의 90%가 불교를 믿어요. 버마족이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샨족, 카렌족, 라카인족 등 130개 넘는 소수민족들로 구성돼 있어요. 분쟁이 일어난 라카인 지역은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라카인족의 이름을 딴 것으로, 예전에는 아라칸이란 이름으로 불렸어요.

라카인 지역은 17세기까지 인도와 포르투갈에 잇따라 점령을 당하다 18세기 후반 버마족이 세운 꼰바웅 왕조에 의해 미얀마 땅으로 편입됐어요. 이후 세 차례에 걸친 영국-미얀마 전쟁의 결과, 1886년 미얀마는 '영국령 인도'의 한 주로 합병됩니다. 라카인 지역은 1차 영국-미얀마 전쟁(1826년)에서 패배한 미얀마가 영국에 할양한 땅으로, 다른 지역보다 먼저 영국의 식민 통치 아래 들어가게 돼요.

미얀마 라카인주의 로힝야족 난민들이 정부군의 공격을 피해 방글라데시 국경지대로 피란 가고 있어요. 미얀마 정부군과 이슬람계 소수민족인 로힝야족 무장 세력 간의 유혈 충돌로 수백명이 사망하자 국제사회의 우려도 커지고 있어요.
미얀마 라카인주의 로힝야족 난민들이 정부군의 공격을 피해 방글라데시 국경지대로 피란 가고 있어요. 미얀마 정부군과 이슬람계 소수민족인 로힝야족 무장 세력 간의 유혈 충돌로 수백명이 사망하자 국제사회의 우려도 커지고 있어요. /연합뉴스

영국은 미얀마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분할통치 정책(divide and rule)'이란 걸 펼쳤어요. 분할통치 정책이란 피지배층의 민족 감정이나 종교·사회·경제적 이해관계 등을 이용해 피지배 계층 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유발시켜 통일된 반대 세력이 나타나지 못하게 막는 정책이에요. 영국은 미얀마가 수많은 소수민족들로 이뤄진 나라라는 점을 이용,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버마족을 탄압하고 소수민족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수립했죠. 소수민족에게 식민지 정부의 중간 지배층 역할을 맡겨 내부 갈등을 유도하고 통합된 반(反)영국 세력이 생겨나지 못하게 만든 거예요.

1885년 영국은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 이슬람교를 믿는 로힝야족을 의도적으로 이주시킵니다. 로힝야족은 원래 방글라데시 등 벵골만 인근에 살던 소수민족이었죠. 영국은 미얀마인들의 토지를 수탈한 뒤 로힝야족 사람들을 적극 농사에 활용하고 이들을 중간 지배 계층으로 등용하는 등 많은 혜택을 줬어요. 미얀마인으로선 로힝야족이 자기 일자리를 빼앗은 '이교도'로 보일 수밖에 없었죠. 여기에 1942년 영국이 무장한 로힝야족을 시켜 2만5000여 명의 미얀마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미얀마인과 로힝야족 간 뿌리 깊은 적대감이 싹트기 시작한 거죠.

◇핍박이 핍박을 낳다

미얀마 개요 정리 표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얀마 정부는 이슬람교를 믿는 로힝야족을 탄압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1962년 세워진 군부 정권은 로힝야족에 대한 핍박을 제도화했죠. 학교에선 로힝야어로 수업을 할 수 없었고, 로힝야족은 결혼이나 이사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어요. 또 불교 개종(改宗) 등을 조건으로 한 시민권법을 만들어 로힝야족의 시민권을 박탈했죠. 로힝야족을 '무국적 불법 이민자'로 규정한 거예요.

로힝야족의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한 탄압도 이어졌어요. 로힝야족 여성은 자녀를 2명 이상 출산하지 못하고 이를 어기면 징역형에 처하는 내용의 산아제한 정책이 대표적이에요. 이 때문에 셋째를 가진 로힝야족 여성들은 비위생적인 불법 낙태 시술을 받아야만 했어요. 최근엔 여성이 한 번 출산하면 3년간 아이를 갖지 못하고 불교도와 무슬림 간 결혼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기도 했답니다.

핍박이 이어지자 로힝야족은 '아라칸로힝야구원군(ARSA)'이라는 무장단체를 만들어 정부에 저항하고 있어요. 피란 행렬도 이어져 1970년대에는 약 20만명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로 탈출했고 1990년대 초반에는 25만명이 미얀마를 떠났죠. 2012년엔 로힝야족과 미얀마인 간 심각한 유혈 충돌이 발생해 로힝야족 200여 명이 사망하고 14만명이 미얀마를 떠나는 비상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어요.

이제 미얀마-로힝야족 갈등은 국제사회의 심각한 문제가 됐어요. 하지만 아직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을 당장 중단할 생각이 없어 보여요. 미얀마 정부의 실권자인 아웅산 수지(72) 국가고문 겸 외무장관이 최근 "우리 정부는 라카인 지역 주민을 보호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죠. 미얀마 독립운동가 아웅산 장군의 딸인 아웅산 수지는 미얀마 민주화에 앞장서며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인물이에요. 이 때문에 일부에선 "아웅산 수지가 어렵게 잡은 정권을 놓칠까봐 로힝야족 사태를 방관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말하기도 해요.

미얀마-로힝야족 유혈사태 이면엔 이처럼 19세기 제국주의 영국의 식민지 정책, 20세기 미얀마 군부독재 정권으로 이어지는 아픔이 있어요. 영국의 식민 지배 아래 핍박받던 미얀마인, 그런 미얀마인에게 탄압받는 로힝야족 모두 역사의 피해자들일지 몰라요.



공명진 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세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