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일본에 조선붐 일으킨 '한류의 원조'

입력 : 2017.09.05 03:07

[조선통신사]

400~500명 규모 조선통신사 일행, 1만여 인파 환영 받으며 국빈 대접
한양~교토 왕복 1년 가까이 걸려
왜구에 잡혀간 조선 포로 데려오고 문화·상업 교류 넓히는 데 큰 역할
임진왜란 예측에는 실패했어요

얼마 전 조선통신사 행렬이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재연돼 일본과 우리나라 참가자들이 축제 행렬을 펼쳤어요. 조선통신사는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이에요. 조선시대 한양에서 출발한 통신사는 부산과 쓰시마섬, 시모노세키를 거쳐 교토나 에도까지 이동했어요. 한국의 부산시와 일본의 시모노세키시는 지난 2003년부터 문화예술 교류 차원에서 조선통신사 재연 행사를 벌이고 있는데 작년에는 부산에서 행사를 열고 올해는 시모노세키에서 연 것이죠. 또 우리나라와 일본의 민간 단체에서는 공동으로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했는데 올가을에 그 결과가 발표될 예정이라고 해요. 조선통신사는 두 나라의 외교 관계를 위해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최초의 조선통신사 박서생과 이예

조선의 외교 정책은 사대교린을 바탕으로 했어요. 사대(事大)는 큰 나라를 인정해 섬기고 교린(交�)은 이웃 나라와는 친하게 지낸다는 뜻이죠. 중국 명나라를 큰 나라로 받들어 문화·경제적 도움을 받아 이익을 챙기고 주변 일본·여진과는 잘 사귀며 평화롭게 지내 나라의 안정을 꾀한다는 것이에요.

1402년 명나라에서 영락제가 황제 자리에 오르자 조선 왕 태종은 1403년 명나라에서 새로 책봉받았고, 이듬해인 1404년 일본에서 정부 역할을 하는 막부(幕府)의 우두머리 아시카가 장군도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어요. 이로써 중국과 조선, 일본 사이에는 사대교린 외교 관계가 성립됐고, 조선과 일본 두 나라는 교린국으로서 서로 외교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절을 파견하게 됐죠. 이때 조선의 국왕이 막부 장군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 장군이 조선 국왕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라고 하였어요.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정서용

조선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조선에서 일본으로 사절단이 처음 파견된 것은 태종 때인 1413년이었어요. 박분이란 인물을 우두머리 사신 '정사'로 내세운 사절단이었지만 중도에 박분이 병이 나서 중지됐어요. 그 뒤 조선통신사 파견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세종 때인 1429년에 박서생을 정사로, 이예를 부사로 교토에 파견한 것이었어요.

박서생은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 임금에게 보고를 올렸어요. 그는 일본에서 물의 흐름을 이용해 스스로 도는 수차(水車)를 목격하고, 이에 대한 설명과 간략한 모형을 만들어 올리며 수차를 제작할 것을 건의했죠. 세종은 그의 보고에 따라 모형을 만들어 각 도에 보내 수차를 만들게 했어요.

◇한류 아이돌 같았던 통신사의 인기

조선 최고 외교관으로 평가받는 이예는 1401년부터 1410년까지 매년 일본을 왕래하며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한 인물이에요. 15차례에 걸쳐 일본에 억울하게 잡혀간 조선인 667명을 고국에 돌아오게 했고, 1443년 조선이 쓰시마섬의 영주인 소 사다모리와 계해약조〈키워드〉를 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해 조선과 일본의 외교 발전에 바탕을 마련하기도 했어요.

조선통신사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황윤길과 김성일일 거예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인 1590년 3월에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청에 따라 황윤길을 정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하는 통신사가 일본 교토에 파견됐어요. 이들의 목적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과연 조선을 침략할 것인지 알아내는 것이었죠. 두 사람의 보고 내용은 정반대였어요. 1591년 3월, 황윤길은 일본이 곧 전쟁을 벌이려 한다고 했고 김성일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낌새를 찾지 못했다고 했어요. 선조와 대신들은 김성일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가 이듬해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허둥대며 엄청난 위기를 맞았죠.

통신사 행렬은 대략 일행 400~500명이 한양-부산-쓰시마-시모노세키-오사카-교토로 갔다가 다시 그 길로 조선의 한양까지 돌아왔는데 6개월에서 1년 정도가 걸렸다고 해요. 조선 후기에는 일본 막부의 장군이 에도, 즉 지금의 도쿄로 옮겨가 목적지가 도쿄로 바뀌었고요. 이처럼 멀고도 험한 길이었기에 통신사 임무를 맡아 처리한 정사와 부사, 서장관, 함께한 관리와 백성들은 승진하고 상을 받았어요.

일본에서 통신사는 '한류의 원조'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어요. 일본은 통신사 일행을 맞이하는 데 배 1400여 척과 1만여 인원을 동원했고, 행렬이 지나는 도시에선 통신사를 국빈으로 대우하며 대접했어요. 백성들은 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새벽부터 자리를 맡았어요. 일본 지식인들은 통신사 일행과 시문(詩文) 나누기를 영예로 여겼고, 화가들은 화려한 행렬도를 병풍·화첩·판화로 그렸어요. 통신사가 한번 다녀가면 일본 내 조선 붐이 일고 유행이 바뀔 정도였다고 해요.

지금까지도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는 통신사들이 머물며 지나갔던 육로와 해로 곳곳에 그 흔적이 소중한 유산으로 남아있어요.

☞계해약조(癸亥約條)

1443년(세종 25)에 조선이 쓰시마 영주와 무역에 관해 맺은 조약이에요. 조선이 1419년 쓰시마섬을 근거지로 약탈을 일삼던 왜구들을 정벌한 후 한동안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왕래가 중단됐었죠. 그러나 조선과의 교역 없이 생존하기 힘든 쓰시마 영주의 간청으로, 조선이 다시 삼포(三浦·현재 부산·울산·진해의 옛 포구)를 개항해 무역과 근해에서의 어획을 허락하면서 구체적 조약을 체결한 것이에요.




 

지호진·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승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