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끝없는 패턴 반복으로 무한의 세계 표현했죠

입력 : 2017.09.02 03:07

['그림의 마술사, 에셔' 특별展]

수학책 속 '뫼비우스의 띠' 그린 네덜란드 그래픽 미술가 에셔
여행 도중 알람브라궁전에 새겨진 신비한 문양에 반해 작품에 응용
빈 공간 없이 패턴들로 채운 그림… 영화 '인셉션' 등도 그의 작품 인용

이제 여름이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에요. 여름은 더웠지만 방학 중에 여행을 하며 구경했던 장면들은 흐뭇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거예요.

오늘 소개할 미술가는 자신이 여행 중에 본 이슬람 양식 궁전에서 평생의 영감을 얻은 사람이랍니다. 네덜란드의 그래픽 미술가 마우리츠 에셔(1898~1972)인데요. 그는 청년 시절 스페인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궁전을 보고, 궁전의 벽과 바닥에 새겨진 신비로운 문양에 빠져들었어요. 그리고 14년 후 한 번 더 그곳을 방문해 그 문양들을 자기 작품에 본격적으로 응용하기 시작했죠.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는 10월 15일까지 에셔의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어요.

에셔의 작품은 워낙 독특해서 그가 활동한 1940년대에는 당시 미술 분야 전문가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어요. 오히려 수학자와 과학자에게 아주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수학책에 간혹 삽화로 등장하는 유명한 '뫼비우스의 띠'가 바로 에셔의 대표적 작품이죠.

작품1 - 에셔, ‘상대성’, 1953.
작품1 - 에셔, ‘상대성’, 1953.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그림의 마술사, 에셔’ 특별展

요즘 들어 에셔는 전보다 훨씬 인기를 끌고 있어서, 그의 아이디어를 연구해 발전시키는 디지털 미술가, 영화 제작자, 디자이너 등이 넘쳐나고 있답니다. 가령 작품1을 언뜻 보면, 로봇처럼 생긴 사람이 자연스럽게 계단을 올라가거나 내려오거든요. 그러나 이것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한 사람이 디디고 있는 바닥이 저쪽 사람에겐 벽이 되고, 또 저 건너 사람에겐 천장이에요. 이와 똑같은 상황은 영화 '인셉션'에서 꿈속의 꿈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활용된 적이 있답니다.

작품2 에셔, ‘순환’, 1938.
작품2 - 에셔, ‘순환’, 1938.

작품2에서는 소년이 기분이 좋은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집에서 뛰쳐나와 계단을 내려가고 있어요. 3면이 검은색, 흰색, 회색으로 이뤄진 상자들이 계단 옆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데, 소년이 계단을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스르르 무늬로 변신해버립니다. 무늬 하나가 계속 반복되면 패턴을 이루지요. 그림의 윗부분 반 정도는 집과 사람이 있는 입체 공간이었는데, 아랫부분으로 가면서 모두 평평한 패턴으로 바뀌어버렸군요.

작품3 - 에셔, ‘물’, 1952.
작품3 - 에셔, ‘물’, 1952.
에셔의 작품에는 빈 공간이 없는 게 특징입니다. 보통 그림 속에는 중심이 되는 이미지가 있고, 그 이미지를 둘러싼 바탕이 있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에셔의 그림에서는 중심 이미지와 바탕이 뒤엉키며 경계 없이 패턴을 이루는 경우가 많아요. 작품3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어요. 물고기가 조금의 빈틈도 없이 다른 물고기들과 꼭 맞게 얽혀 있습니다. 이렇듯 틈이나 포개짐 없이 동일한 모양으로 완전히 한 면을 채우는 맞춤 구성을 '테셀레이션(tessellation)'이라고 해요.

한국 미술은 여백(餘白·빈 공간)의 아름다움을 중요시한다고 알려져 있어요. 여백은 마음을 비워내고 명상을 통해 고요하고 무한한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니까요.

그러나 이슬람 미술에서는 한국 미술의 여백과 반대되는 방식으로 무한함을 표현합니다. 이슬람 미술에서는 사람과 동물 이미지 대신, 식물과 도형에서 비롯된 무늬가 중심을 이루죠. 특히 넝쿨식물이 반복되는 패턴을 '아라베스크(arabesque)'라고 불러요. '아라비아풍'이라는 뜻인데, 요즘도 카펫이나 식탁보 등에서 종종 볼 수 있어요. 이슬람 사원에 기도하러 오는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은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이어지고 빈틈없는 무늬를 보면서 기도 동작을 되풀이한대요.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무한한 우주를 경험하는 것이죠.

작품4 에셔, ‘작게 더 작게’, 1956.
작품4 - 에셔, ‘작게 더 작게’, 1956.
실제로 에셔가 반복 패턴과 무한의 개념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라베스크 무늬를 연구하면서부터였어요. 작품4를 보세요. 테셀레이션 기법을 이용해 반복과 무한을 표현한 것인데, 언뜻 보면 아라베스크 무늬처럼 느껴집니다. 도마뱀들이 틈새 없이 둥글게 엉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들은 가운데를 향해 끝도 보이지 않게, 하나의 점이 될 때까지 작아져 갑니다. 에셔의 경우처럼, 여행 중 무심코 만난 무늬 하나가 어떤 사람에게는 일생의 아이디어로 남기도 한답니다.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박승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