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명옥의 명작 따라잡기] 탐스러운 포도송이, 풍요·기쁨·희망 상징해요

입력 : 2017.08.26 03:07

[명화 속 포도]

풍성한 열매와 달콤한 맛 덕분에 '과일의 여왕'으로 불리는 포도
풍요로운 가을, 강인한 생명력 등 미술 속 다양한 상징으로 나타나요

포도는 비타민과 유기산이 풍부해 피로 해소에 좋은 데다 맛도 달콤해 과일의 여왕으로 불립니다. 한 가지에 많은 열매를 맺기 때문에 풍요와 희망, 기쁨을 상징하는 과일로 사용되기도 하죠.

풍요의 상징인 포도는 16세기 신성로마제국 궁정화가인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작품1에서 만날 수 있어요. 중년 남자의 옆모습을 그린 초상화입니다. 얼굴과 옷을 자세히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있죠. 남자의 두상은 가을에 나오는 과일과 채소들로 구성돼있어요. 왜 가을 식물들을 조합해 두상을 만들었을까요?

작품1 - 주세페 아르침볼도, ‘가을’, 1573년.
작품1 - 주세페 아르침볼도, ‘가을’, 1573년.

아르침볼도는 인생의 각 단계를 사계절에 비유한 4점의 초상화를 남겼는데 이 그림은 중년 남자를 가을에 비유한 거예요. 다른 3점의 그림에서 소년은 봄, 청년은 여름, 죽음을 앞둔 노인은 겨울에 비유했어요.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야 하며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사계절에 비교하면서 지혜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어요.

아르침볼도는 풍요로운 가을을 대표하는 식물이 포도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남자의 화관은 포도 넝쿨, 머리카락은 포도송이, 옷은 참나무로 만든 포도주 통으로 만들어졌거든요.

작품2 - 카라바조, ‘병든 바쿠스’, 1594년경.
작품2 - 카라바조, ‘병든 바쿠스’, 1594년경.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가 그린 작품2에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포도주의 신 바쿠스를 만날 수 있어요. 포도나무와 포도주의 신인 바쿠스가 머리에 포도 넝쿨 화관을 쓰고, 두 손에 포도송이를 들고 생각에 잠겼어요. 탁자 위에도 알이 굵고 잘 무르익은 포도송이가 놓여있어요.

바쿠스는 웬일인지 얼굴에 병색이 짙습니다. 푸른빛이 감도는 창백한 피부와 입술이 그가 병자임을 말해줍니다. 당시 여러 화가가 바쿠스를 그렸지만 병든 바쿠스를 그린 사람은 오직 카라바조뿐입니다. 카라바조를 연구한 학자들은 그림 속 바쿠스가 화가 자신이라고 추정해요. 카라바조는 이탈리아 반도를 휩쓴 흑사병에 걸려 6개월가량 병원에서 치료받고 기적적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합니다. 몸이 회복된 이후에 그린 그림에 자연스럽게 죽음의 공포와 고통스러운 체험이 녹아들었어요. 그런 한편 술의 중독성을 경고하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해요. 건강에 좋은 포도주도 너무 많이 마시면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암시하죠.

17세기 스페인 화가 후안 페르난데스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포도를 그릴 수 있는 실력을 가졌다고 뽐내기 위해 작품3을 그렸어요. 그림 속 네 송이 포도는 사람의 눈을 감쪽같이 속일 만큼 실제 포도와 똑같아 보여요. 알알이 영근 포도송이에 비치는 햇빛 효과,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포도 넝쿨, 세밀한 잎맥까지도 완벽하게 그려냈어요.

작품3 - 후안 페르난데스, ‘네 포도송이가 있는 정물’, 1636년경.
작품3 - 후안 페르난데스, ‘네 포도송이가 있는 정물’, 1636년경.

이 그림은 미술사에서 유명한 '제욱시스의 포도' 일화를 떠올리게 해요. 고대 그리스에서 당대 최고의 화가인 제욱시스와 파라오시스가 그림 그리기 대결을 펼쳤어요. 제욱시스는 실물과 똑같은 포도나무를 그렸는데, 새가 포도를 쪼아 먹으려고 그림을 향해 달려들었어요. 우쭐해진 제욱시스가 파라오시스에게 커튼을 걷어 그림을 보여 달라고 말했어요. 놀랍게도 그 커튼은 진짜가 아니라 파라오시스가 그린 그림이었어요. 제욱시스는 "나는 새의 눈을 속였지만, 자네는 화가의 눈을 속였으니 내가 졌네"라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고 합니다. 이 일화는 많은 화가에게 실물로 착각하게 할 만큼 사실적인 그림을 그려야만 훌륭한 화가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어요. 후안 페르난데스도 고대 일화에서 자극받아 실물 같은 그림을 그렸던 화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의 화가 김종학은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을 포도 그림에 담았어요. 작품4 속 푸른 포도알에서 생명의 강한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포도는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해요. 김종학은 세상 만물을 낳고 길러 주는 자연의 생명력을 표현하고자 자신만의 재료와 기법을 개발했어요. 화폭은 길거리에 붙이는 광고포스터를 활용해 금속 볼트로 박아 만들었어요. 포도알과 바탕색은 연구와 실험을 통해 직접 개발한 특수 물감을 칠했어요.

작품4 - 김종학, ‘푸른 포도’, 2009년.
작품4 - 김종학, ‘푸른 포도’, 2009년.
포도를 파란색으로 표현한 의도는 파랑이 삶의 희망과 우주적 질서를 상징하는 색이기 때문입니다. 또 화폭 뒤 바탕색은 색이 선명하고 광택이 나는 자동차용 우레탄 페인트를 사용했어요. 화폭 일부분에 노랑, 분홍색을 칠해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변화를 줬어요. 그 결과 자연미와 인공미가 조화를 이루는 포도 그림이 탄생했어요.

이 포도 그림은 자연은 생명을 창조하고 예술가는 아름다움을 창조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 극작가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겨울이야기'에 "예술은 그 자체가 자연이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포도의 계절을 맞아 포도를 표현한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자연과 예술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의미가 있겠어요.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기획·구성=박승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