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책을 사랑한 임금 정조, 병풍에도 책장 그려 넣었죠

입력 : 2017.08.22 03:05

[책거리]

미국서 전시 중인 옛 그림 '책거리'… 강렬한 색채와 뛰어난 구성에 호평
정조, 권위 상징 '일월오봉도' 대신 '책가도' 병풍 세울 정도로 좋아해
책거리 안 그린 신하 귀양 보내기도

미국 오하이오주(州) 클리블랜드미술관에서 '책거리'라는 우리 옛 그림이 전시되고 있어요. 미술관 전시 기획자들은 물론 일반 관람객들의 눈길과 관심이 쏠리고 있대요. 책거리 그림 전시는 이미 작년 가을 뉴욕과 올봄 캔자스에서 열린 바 있는데, 그때도 미국 평론가들과 관람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요. "동양화이면서도 화려한 채색과 뛰어난 구성이 독특하고 아름답다" "은은한 수묵화와는 달리 강렬한 색채로 원근과 명암을 이용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점이 인상적이다"는 등의 칭찬이 이어졌어요.

책거리는 책과 도자기, 문방구, 화병 등을 화폭에 그린 그림으로 문방도(文房圖)라고도 해요. 책을 얹어놓은 선반인 책가(서가)를 그린 그림이라 책가도(冊架圖)라고도 불리죠. 조선 후기인 18세기 후반에 처음 그려지기 시작해 양반층에게 인기를 얻었으며 19세기 이후로는 서민층까지 크게 유행했어요. 책거리 그림이 유행하게 된 데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영향이 컸습니다.

◇책거리를 사랑한 정조

"도화서 화원 전원을 대상으로 실력이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새 차비대령화원으로 삼겠다. 그들을 규장각 소속으로 두어 여러 중요한 그림을 그리게 하겠노라!"

1783년 정조는 예조에 속해있던 도화서(圖畵署)의 화원 중 그림 실력이 뛰어난 자들을 선발해 규장각 소속에 두고 직접 관리했어요. 그들을 차비대령화원이라고 불렀는데, 원래 영조 때부터 임시로 운영되던 제도로 영조의 친필을 베껴 쓰는 일을 주로 했죠. 이를 정조가 규장각 소속의 정식 조직과 관리로 만들어 운영한 것이에요. 정조는 차비대령화원 제도를 실시하며 그들에게 녹취재(祿取才)라는 별도의 시험을 치르게 했어요. 정조는 녹취재로 그림 실력이 향상된 화원들을 승진시키거나 포상했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야단을 치거나 심한 경우 파면 또는 멀리 귀양 보내는 벌을 내리기도 했어요.

1788년 9월, 정조 임금이 차비대령화원들이 녹취재에 올린 그림을 보고 버럭 화를 내는 일이 벌어졌어요. "화원 신한평과 이종현 등은 각자 원하는 것을 그려내라는 명이 있었으면 책거리를 마땅히 그려내야 하는 것이거늘, 모두 다른 그림을 그려내 실로 해괴하니 함께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라!"

당시 녹취재에 제출하는 그림의 주제는 화원이 자유롭게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그런데 분명 시험에서 각자 원하는 것을 그려내라고 했음에도, 정조는 신한평과 이종현 등이 책가도를 그리지 않았다고 하여 이들을 크게 꾸짖었어요. 신한평은 신윤복의 아버지로 김홍도와 더불어 정조의 어진(御眞·왕의 초상화)을 그린 화가이고, 이종현은 아들 이윤만, 손자 이형록 삼대가 책거리 그림으로 이름을 날린 화가였어요. 그러니 이들은 그림 실력이 문제였다기보다, 정조가 바라는 대로 책거리를 그리지 않아 정조의 노여움을 산 것이죠. 정조는 이들을 귀양 보내고 바로 그날 장한종과 김재공, 허용을 차비대령화원으로 임명했다고 해요.

◇일월오봉도를 치우고 책가도를 놓다

정조가 이렇듯 책거리에 애착을 보인 것은 유난히 책을 사랑한 임금이었기 때문이에요. 정조는 세손 시절이나 왕위에 오른 뒤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곁에 두고 읽었어요. 직접 책을 쓰거나 신하들에게 명을 내려 수많은 책을 편찬하게 했죠. 책거리에 대한 정조의 애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어요. 1791년 정조는 궁궐에서 임금의 자리인 어좌 뒤에 일월오봉도 병풍 대신 책가도 병풍을 놓게 했어요. 일월오봉도는 해와 달 앞에 다섯 산봉우리를 그린 그림으로 왕의 권위와 존엄을 상징하는 그림이죠. 당연히 주변에서 만류하고 나섰어요.

"전하, 일월오봉도는 권위의 상징으로 반드시 어좌 뒤에 배치해야 하는 그림입니다."

그러나 정조는 듣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고 대신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림을 어좌 뒤에 놓겠다."

정조의 명령이 실행된 다음 날 대신들이 편전에 들었어요. 어좌 뒤에 늘 봐왔던 일월오봉도 대신 책가도 병풍이 놓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죠. 그때 정조가 대신들에게 말했어요.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정서용

"아! 어좌 뒤에 이것은 진짜 책장이 아니오. 당연히 책장 속 책들도 진짜 책이 아니라오. 혹시 이 병풍 그림을 진짜 책장으로 착각했소? 내가 이 책가도 병풍을 어좌 뒤에 펼친 것은 요즘 그 바탕을 알 수 없는 불순한 글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여 이를 경계하기 위함이오."

이듬해 정조는 책가도를 대신들에게 보여주며 언급했던 '불순한 글'에 대한 조치로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실시하기도 해요. 정조가 이처럼 책가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자 양반들을 앞을 다투어 책가도 병풍을 집에 설치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책거리는 서민층도 사랑하는 그림인 민화로 널리 퍼지게 된 것이에요.

☞문체반정이란?

정조의 명령으로 모든 저술 활동에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옛 한문 문체를 쓰도록 한 것을 말해요. 당시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패관소품’, 즉 소설이나 수필을 쓰듯 가볍게 문장을 쓰는 문체가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에 표현되며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자유롭고 솔직한 글이 인기를 얻었어요. 정조는 이런 문장이 조선의 전통과 풍속을 해친다며 사용하지 못하게 했어요. 정조는 패관소품 같은 책들에 대해 수입을 금지했고, 박지원 등에게 불순한 문체를 쓴다는 이유로 반성문을 쓰게 했죠.


 

지호진·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승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