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삼색기'는 아프리카 독립의 상징… 주변국도 차용했죠

입력 : 2017.08.17 03:08

[에티오피아]

'솔로몬 후예' 자부하는 에티오피아
19세기 제국주의 열강 침략 이겨내 아프리카 독립국 희망으로 떠올라

2차대전 후 국제사회 협력 다짐… 어려운 나라 돕는 일 의무로 여겨
6·25전쟁땐 군사 6000명 보내기도

에티오피아가 지난 4일 북한 대사관의 은행 계좌 수를 제한하겠다고 밝혔어요. 북한의 5차 핵실험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내린 제재에 적극 동참하는 모습이에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에티오피아는 세계 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나라예요. 아프리카에서 최대 규모이면서 세계에서 다섯째로 많은 난민을 수용하고 있죠. 1950년 6·25전쟁 당시 아프리카에선 유일하게 한국에 지상군을 보내준 나라이기도 하죠.

◇솔로몬의 후예,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의 역사는 기원전 10세기쯤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구약성서에 의하면 아프리카 동부의 에티오피아와 아라비아반도 남부의 예멘 지역을 통치하던 '시바'라는 왕국의 여왕이 이스라엘 왕국의 솔로몬 왕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요. 그의 이름이 메넬리크 1세고 '악숨' 왕국을 건설했다고 전해져요. 악숨 왕국은 이슬람 세력이 확장되는 7세기 무렵까지 지중해와 인도 사이의 무역을 통해 부를 쌓고 아프리카 동북부 지역과 아라비아반도 남부 지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죠.

에티오피아 남부 이르가체페에서 농부들이 커피콩을 말리고 있어요.
에티오피아 남부 이르가체페에서 농부들이 커피콩을 말리고 있어요. 커피의 원산지답게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최대 커피 생산국이에요. 국민 4명 중 1명이 커피 산업에 종사하고 있답니다. /블룸버그
역사학자들은 메넬리크 1세가 진짜 솔로몬의 후예인지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고 해요. 게다가 악숨 왕국은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형성됐다고 보고 있죠.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에티오피아인들은 자신들이 솔로몬의 후예임을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아요. 1996년 제정한 국기 정중앙의 파란색 원 안에 솔로몬을 상징하는 노란색 별 모양을 새겨 넣은 것을 보면 말이죠.

◇아프리카 독립의 상징이 된 삼색기

에티오피아인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은 솔로몬의 후예라는 것 외에 한 가지 더 있어요. 외세의 지배를 거의 받지 않고 독립국 지위를 오랫동안 이어왔다는 것이에요. 이는 에티오피아의 산악 지형이 큰 몫을 했어요. 수도인 아디스아바바를 비롯한 대부분 지역이 평균 해발고도 1500m 이상이고, 가장 높은 곳은 4620m나 돼요. 덕분에 이슬람 세력이 빠른 속도로 확장하던 시기에도 기독교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어요.

에티오피아는 어떤 나라?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집어삼키던 19세기 후반에도 에티오피아는 유일하게 독립국으로 남은 나라예요. 물론 위기는 있었죠. 1889년 이탈리아가 북부 지역을 침공해 에티오피아를 보호국으로 만들려 했어요. 에티오피아의 왕 메넬리크 2세는 수년간 군대를 키우면서 이탈리아와의 전면전을 준비했죠. 1896년 이탈리아가 약 2만의 군대를 이끌고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자 메넬리크 2세는 직접 군대를 지휘해 반격에 나섰어요.

3월 1일 에티오피아 북부 아두와에 도착한 이탈리아군은 경악을 금치 못했어요. 꾸준히 전쟁을 준비해온 에티오피아의 병력이 8만에 이르렀기 때문이에요. 이탈리아군은 1만5000여 명이 전사하면서 참패를 당했어요. 이탈리아는 결국 에티오피아의 독립국 지위를 인정하는 '아디스아바바 조약'을 체결했고, 동아프리카 지역의 일부 영토를 상실했어요. 용맹하게 싸워 승리한 메넬리크 2세는 '아프리카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게 됐죠.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독립국가의 상징이 됐어요. 훗날 20세기에 유럽으로부터 독립한 가나, 말리, 세네갈, 카메룬, 토고 등은 자국 국기에 에티오피아 국기 색깔(빨강, 노랑, 초록)을 차용해 오랜 독립을 염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어요.

◇6·25에 참전한 '강뉴' 부대

1935년 전체주의의 광기에 휩싸인 이탈리아는 아두와 전투의 복수를 들먹이며 다시 에티오피아를 침략해요. 에티오피아군은 분전했으나 독가스를 사용하는 이탈리아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연전연패했죠. 국왕 셀라시에 1세는 영국으로 망명했어요. 셀라시에 1세는 국제연맹에서 "오늘은 우리 차례지만, 내일은 당신들 차례일 것"이라며 유럽에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질 위험이 있음을 알렸어요. 또 이탈리아에 대항해 싸우는 자국민들을 위해 무기를 구입할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호소했죠.

6·25전쟁 당시 한국에 파병된 에티오피아‘강뉴 부대’병사들이 지휘관의 설명을 듣고 있어요.
6·25전쟁 당시 한국에 파병된 에티오피아‘강뉴 부대’병사들이 지휘관의 설명을 듣고 있어요. /미 국무부
국제사회는 그의 외침을 무시했어요.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에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제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수립하고 5년간 지배했어요. 1941년 영국이 에티오피아에서 이탈리아를 몰아낸 뒤 셀라시에 1세를 복위시켰어요. 침략자에 대한 국제사회의 방관과 집단 안보 정신 결여로 인해 뼈아픈 경험을 했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만들어진 유엔(국제연합)에 가입했어요.

셀라시에 1세는 1950년 발발한 6·25전쟁 때 머뭇거리지 않고 자신의 친위대를 파병했어요. 반드시 승리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파병 부대의 이름은 에티오피아어로 '격파한다'는 뜻을 가진 '강뉴'로 지었죠. 강뉴 부대는 무패 신화를 자랑하며 이역만리 타국에서 분투했고, 한국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됐죠.

에티오피아는 한반도에 연인원 6000여 병력을 파병해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어요. 한국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그런 피해를 감수한 이유는, 이탈리아에 침략당했을 때 국제사회로부터 외면당했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어요. 에티오피아는 국제사회가 강력한 집단행동으로 세계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겼죠. 오늘날도 에티오피아는 정치·경제적 어려움에도 어려운 나라를 돕는 일을 '선택'이 아닌 '의무'로 여기고 있어요.

공명진 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승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