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명옥의 명작 따라잡기] 고야, '검은 그림'으로 광기·폭력·잔혹함 담아냈어요

입력 : 2017.08.05 03:10

[미술 속 검정 이야기]

빛 반사하지 않고 흡수하는 검은색… 어둠·공포 등 부정적 이미지 있지만
엄숙하고 경건한 느낌 표현하면서 권위·현대적 아름다움 상징하기도
예술가들에겐 다양한 영감의 원천

사람이 색을 볼 수 있는 것은 물체가 빛을 반사하거나 흡수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면 녹색 식물은 녹색 빛을 반사하고 다른 색은 흡수해 녹색으로 보입니다. 검은색은 빛을 반사하지 않고 모두 흡수해 검게 보여요. 검정은 어둠, 죽음, 공포, 불행, 절망 등을 상징하는 색이지만 권위와 부유함, 현대적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색으로도 쓰이고 있어요. 화가들은 어떻게 검정을 활용했는지 살펴볼게요.

19세기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검은색으로 표현했어요. 작품1은 깊은 밤 숫염소 모습을 한 악마와 마녀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는 장면을 그린 겁니다.

작품1 프란시스코 고야, ‘마녀들의 연회’, 1820~1823년
작품1 - 프란시스코 고야, ‘마녀들의 연회’, 1820~1823년

왜 그림에서 불길하고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까요? 대부분 검정으로만 그렸기 때문이죠. 고야가 검은색만으로 그림을 그린 데는 이유가 있어요. 그는 인간의 악한 본성에 해당하는 광기, 폭력성, 잔혹함을 표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색이 검정이라고 생각했죠. 고야는 1820년부터 약 4년에 걸쳐 자기 집 실내 벽에 검은색을 사용해 벽화를 14점 그렸어요. '검은 그림' 연작이라고 하죠.

19세기 초 스페인은 전쟁과 혁명, 종교 탄압으로 나라가 분열하고 혼란스러운 상태였어요. 그림 속 악마와 마녀는 국민을 억압하고 탄압했던 스페인 왕국과 타락한 교회를 상징해요. 그런 한편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증오심과 미신, 어리석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고야는 공포스러운 시대 분위기를 검은색에 담아 고발한 것이죠.

작품2 카지미르 말레비치, ‘검은 사각형’, 1915년
작품2 - 카지미르 말레비치, ‘검은 사각형’, 1915년

20세기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에게 검정은 엄숙하고 경건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신성한 색이었어요. 작품2에서 말레비치는 왜 흰색 화폭에 검은색 정사각형만을 그렸을까요?

눈에 보이는 현실을 화폭에 모방하는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를 그리고 싶었어요. 그는 예술의 최종 목적은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고, 그것은 물질세계 너머 정신세계를 추구할 때 이뤄진다고 믿었어요. 순수한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현실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주제나 내용이었어요. 기하학적 형태인 정사각형을 그린 것은 자연물을 대상으로 삼는 전통적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거죠. 검은색을 선택한 것은 물체에 닿은 빛을 모두 흡수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에요. 일상의 모든 색깔, 모든 소리, 모든 움직임을 흡수한 깊고 고요한 정신세계를 표현하려면 검은색이 꼭 필요했던 겁니다.

작품3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회색과 검정색의 조화, 제1번’, 1871년
작품3 -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회색과 검정색의 조화, 제1번’, 1871년

19세기 미국의 화가 제임스 휘슬러에게 검정은 색의 효과를 탐구하는 도구였어요. 작품3에 등장한 노부인은 휘슬러의 어머니예요. 휘슬러는 어머니의 외모나 심리 상태를 표현하려고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어요. 검은색과 회색을 어떤 방식으로 배치하면 그림이 아름답고 조화롭게 보일 것인지 실험하려고 어머니를 초상화 모델로 세웠어요. 그 증거로 그림을 관찰하면 다양한 검은색과 회색을 발견하게 됩니다. 노인의 검정 드레스와 두건, 벽지, 판화, 커튼에서 여러 종류의 검은색과 회색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에요. 검은색과 회색의 효과를 치밀하게 계산해 연출한 결과랍니다. 재미있게도 화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관객들은 이 그림에서 자식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상을 발견했어요. 이 초상화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어머니 초상화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답니다.

한국 작가 이재삼에게 검은색은 모든 색의 기본이 되는 색이에요. 작품4는 경남 통영에서 배를 타고 가면 닿는 무인도를 그린 밤 풍경화예요. 검은색만을 사용해 그렸는데 밤의 고요와 정적, 달빛의 은은한 효과까지도 표현했어요. 비결은 독특한 기법과 미술 재료에 있어요.

작품4 이재삼, ‘달빛 심중월’, 2007년
작품4 - 이재삼, ‘달빛 심중월’, 2007년
이재삼 작가는 밑그림이나 습작용 도구로 쓰는 목탄을 사용해 20년 동안 그림을 그립니다. 나무를 숯가마에서 탄화시켜 만든 천연 연료인 목탄의 검정은 화학 물감의 검정과는 광택도, 질감도 달라요. 목탄의 검정은 깊고 짙으며 오묘해요. 즉 같은 검정이지만 또 다른 검정이죠. 목탄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에는 어려움이 따라요. 목탄 입자는 캔버스에 잘 붙지 않고 떨어지거든요. 작가는 끊임없는 재료 연구와 실험을 통해 목탄을 캔버스에 붙게 하는 기법을 개발했어요. 캔버스에 목탄을 칠하고 손가락으로 문지른 다음 다시 목탄으로 그리고 또다시 문지르는 과정을 되풀이합니다. 그 바람에 오른손 엄지와 검지의 지문이 거의 없어졌어요. 이런 힘든 과정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목탄의 검은색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최고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검은색으로 그린 작품들은 검정이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색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어요. 앞으로 명화를 감상할 때면 검은색을 얼마나 많이 썼는지 관찰하는 기쁨을 누려보세요.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기획·구성=박승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