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도쿄에서 일제 간담을 서늘케 한 독립투사들

입력 : 2017.07.18 03:11

[이봉창·김지섭·박열]

항일운동가 이봉창, 김지섭, 박열… 도쿄에서 日帝 주요 인사들 노려
거사는 실패하고 체포되었지만 조선 독립 의지 세계 만방에 알려
이봉창 의거 소식 전한 佛 신문… 조선일보 뉴지엄에서 볼 수 있어요

최근 조선일보의 박물관 '뉴지엄'에 귀중한 신문 한 부가 기증됐어요. 프랑스 주간지 '릴뤼스트레 뒤 프티 주르날' 1932년 1월 17일 자예요. 표지에는 갓을 쓰고 한복을 입은 인물이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져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삽화가 있고, 그 아래 '도쿄에서 일어난 습격'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어요. 바로 한국의 이봉창 의사가 일본 국왕을 향해 폭탄을 던진 사건을 다룬 기사예요. 이 신문을 기증한 정운대씨는 1988년 프랑스 유학 중에 파리의 센 강변을 산책하다 우연히 어느 고서점에서 그 신문을 보게 돼 구입한 것이라고 해요. 정씨는 그동안 소중히 간직한 이 신문을 조선일보 지령 3만호 발행을 맞이해 조선일보 뉴지엄에 기증했어요. 그 뜻을 기리며, 일본의 심장부 도쿄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폭탄을 던진 용감무쌍한 독립투사들을 재조명해볼게요.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 이봉창

'새해 1월 8일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육군 사관병식이 열리는데 이곳에 천황이 참석할 예정임'.

1931년 12월 28일, 일본 수도 도쿄의 어느 허름한 여관에 머물던 이봉창은 아사히(朝日) 신문에 난 위와 같은 기사를 보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굳은 다짐을 했어요. "그래. 바로 이날이 의거를 결행하는 날이다!'


[뉴스 속의 한국사] 도쿄에서 일제 간담을 서늘케 한 독립투사들
/그림=정서용
이봉창은 1901년 지금의 서울 용산구에서 태어났는데 일본인이 운영하는 과자점과 약국의 점원, 용산역 직원으로 일했어요. 한국을 떠나 일본 오사카에서 일하며 '기노시타 마사조'라는 일본 이름으로 살기도 했어요. 그러나 일본에서 조선인이 심한 차별과 수모를 당하는 것을 보고 느끼며 항일의식이 싹터 '한국인 이봉창'으로 떳떳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1930년에 중국 상하이로 향했어요. 그 뒤로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김구를 만나며 독립운동의 의지를 키워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이 되었고 수류탄을 던져 일왕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품었죠.

1932년 1월 8일, 도쿄 사쿠라다문 부근 경시청 앞. 일왕 히로히토를 태운 마차 행렬이 군대의 사열식 참관을 마치고 궁성으로 돌아가는 중에 그 행렬을 향해 이봉창은 두 개의 수류탄을 던졌어요. 폭발 소리가 주변을 흔들고, 마차가 뒤집히고, 경시청 앞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지만 이봉창은 일왕을 살해하는 데 실패하고 말아요. 이봉창은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그해 9월 30일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열흘 뒤인 1932년 10월 10일에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목숨을 잃었죠. 그러나 그의 의거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고, 독립을 이루려는 한국인들의 강한 의지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어요.

◇도쿄의 심장을 노린 김지섭과 박열

이봉창 의사가 의거를 일으키기 10여 년 전에 역시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에 가서 일본 국왕과 그 가족들이 사는 궁성에 폭탄을 던진 또 다른 한국인이 있었어요. 의열단이라는 항일단체에 가입해 상하이와 베이징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김지섭이란 인물이에요. 1923년 9월 일본의 관동 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 때 일본에 사는 수많은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학살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자 김지섭은 이 소식을 듣고서 일제에 되갚아 줄 기회를 엿봤어요. 그러던 중에 1924년에 도쿄에서 제국의회라는 행사가 열려 일제 총리를 비롯한 여러 대신과 함께 조선 총독이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죠.

"관동대학살을 일으킨 일제 앞잡이들을 처단하여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한국 동포들의 원혼을 달래주겠노라!"

김지섭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국회의사당에 들어가 폭탄을 던지려 했으나 의회가 무기한 연기되자 계획을 변경하여 일본 궁성에 폭탄을 던지기로 하였어요. 1924년 1월 5일, 김지섭은 궁성과 궁성 입구에 놓인 니주바시라고 부르는 다리에 세 발의 폭탄을 던졌는데 안타깝게도 모두 불발이 되었고 김지섭은 그 자리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지요. 결국 김지섭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일본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28년 2월 20일에 44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어요.

일제의 관동대학살 중에 일본 국왕에게 폭탄을 던져 암살하려던 계획을 품었던 인물도 있었어요. 18세의 나이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흑도회, 흑우회 등의 항일단체를 이끌던 박열이란 인물이에요. 박열은 1923년 9월 3일, 일본 국왕을 폭탄으로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가 우리나라가 광복을 되찾을 때까지 무려 22년 2개월이라는 긴 옥살이를 치러야 했죠. 두 인물의 의거 역시 독립을 향한 한국인의 의지를 세계에 널리 알리며 독립운동에 새바람을 일으켰어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억압당하며 살던 한국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죠.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사건]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9분, 일본의 관동 지역에 대지진이 일어나 도쿄, 요코하마 지역을 중심으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어요. 일본 사회는 혼란과 불안에 빠졌고, 일본 정부는 국민의 비난을 피하고자 "조선인이 폭동과 방화를 일으켰다" "조선인이 일본인을 죽이려고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등의 거짓 소문을 퍼뜨렸어요. 일본 내 불만의 화살을 조선인 탓으로 돌리려는 속셈이었죠. 크게 분노한 일본인들이 일본에 살거나 머무르던 조선인, 즉 조선 이주민과 유학생 등 수천 명을 학살하는 끔찍하고도 비참한 사건이 벌어졌어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저술가 기획·구성=박승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