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흥청'들과 놀다 나라 망친 연산군

입력 : 2017.07.04 03:10

[사치에 빠졌던 왕들]

폭군 연산군, 기생들과 잔치열고 충렬왕은 매사냥에 빠져 국정 뒷전
고구려 봉상왕과 백제 동성왕도 백성 굶주리는데 화려한 궁궐 지어
방탕한 생활 일삼다 민심 잃은 왕들 대부분 비참한 말로를 맞았어요

"사치품에만 7375억… 김정은의 돼지 저금통"

6월 27일 조선일보에 실렸던 기사 제목이에요. 북한의 김정은 조선노동당 위원장이 온갖 불법 행위로 긁어모은 돈으로 자신만의 돼지 저금통, 즉 개인 금고를 채우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북한 주민들은 굶주려도 김정은은 그 돈으로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는 거예요. 나라를 통치하는 최고 권력자가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결국 나라의 운명마저 위태롭게 만드는 모습을 우리 역사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죠.

◇'흥청망청'의 장본인, 연산군

민생은 뒷전인 채 사치와 향락만 추구한 지도자의 말로는 대부분 좋지 않았답니다. 역사 속 대표적인 폭군으로 사람들은 조선의 제10대 왕 연산군을 꼽아요. 방탕한 생활을 즐긴 연산군은 채홍사라는 관리를 두고 예쁜 여자들과 좋은 말을 구해오게 했어요. 채홍사가 궁궐에 데리고 온 여자들 중 특히 용모가 빼어나고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이를 뽑아 '흥청(興淸)'이라 불렀죠. 연산군은 흥청을 매일 불러 놓고 떠들썩하게 풍악을 울리며 잔치를 베풀었다고 해요. 돈이나 물건을 아끼지 않고 함부로 쓴다는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어요.

[뉴스 속의 한국사] '흥청'들과 놀다 나라 망친 연산군
/그림=정서용
고려 25대 임금 충렬왕 또한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성들의 원망을 들었어요. 원나라에서 즐겼던 매사냥을 잊지 못해 '응방(鷹坊)'이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매의 사육과 사냥을 맡겼죠. 사냥을 위해 산이나 밭에 불을 지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고 해요. 사냥을 핑계로 왕비 몰래 궁녀들과 놀기도 했죠. 응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는데 당시 백성들이 원나라에 보낼 각종 공물을 준비하느라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상황을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죠.

◇풍악 소리 높은 곳에 원성도 높았다

삼국시대에도 사치와 향락을 일삼다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임금이 있었어요. 고구려 제14대 왕 봉상왕이 그중 한 명이죠. 봉상왕은 자신의 삼촌인 달가가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죽이고, 동생인 돌고에게도 반란죄를 뒤집어씌워 죽였어요. 훌륭한 신하 창조리를 국상에 등용해 연나라의 침입을 물리치기도 했으나 차츰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어요. 298년과 299년 심한 가뭄과 지진 등으로 백성이 굶주리고 있는데 오히려 화려한 궁궐을 지으려고 강제적으로 백성들을 모으고 물품을 거뒀어요. 창조리가 봉상왕에게 "임금이 백성을 걱정하지 않으면 어질지 못한 것이요, 신하가 임금에게 바른말을 올리지 못하면 충성을 하는 것이 아니옵니다"라며 이를 말렸어요. 그러나 봉상왕은 "국상은 백성을 위해 죽고 싶은 모양이군. 그렇지 않다면 다시는 내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며 창조리의 간언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오히려 창조리를 죽이려 했어요. 이에 창조리가 봉상왕을 왕의 자리에서 쫓아내려고 다른 신하들과 뜻을 모았죠. 봉상왕은 뒤늦게 사태를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고 두 아들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백제의 제24대 왕 동성왕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기에 빠진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던 왕이었어요. 488년과 490년 북쪽 선비족이 세운 북위의 두 차례 공격을 막아냈으며, 494년과 495년에는 신라와 백제를 번갈아 침입한 고구려 군대를 신라와 힘을 합쳐 막아냈죠. 498년에는 지금의 제주도인 탐라국을 정벌했어요. 내부의 정치적인 혼란을 수습하며 왕권도 강화했고요. 그러나 이후 동성왕은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기에만 힘썼어요.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죽어가는데, 궁궐의 창고를 여는 대신 향락에 빠져 사치스러운 일들을 벌였지요. 500년에 궁궐 동쪽에 높이가 10여m나 되는 임류각이란 누각을 지었으며, 그곳 주변으로 연못을 파고 기이한 새를 기르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어요. 신하들이 항의하는 글을 올리자 이를 귀찮게 여겨 대궐의 문을 닫아버렸다고 해요. 자신은 대궐에서 술판을 벌이거나 사냥을 다니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을 멈추지 않았고요. 501년 겨울에 사냥을 나갔다가 큰 눈에 길이 막혀 사비의 마포촌이라는 곳에 머물게 됐는데, 거기서 동성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위사좌평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어요.

이렇듯 방탕한 생활을 일삼은 지도자들은 대부분 비참한 말로를 맞고, 역사의 엄중한 심판을 받았답니다.


연산군의 사냥터

연산군은 사냥이나 놀이를 위해 자신만의 사냥터를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백성들이 큰 고통을 겪었어요. 사냥터로 삼은 지역에는 민간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금표(禁標)'를 세우고 금표 내의 민가를 강제로 철거했기 때문이죠. 또 그 사냥터에 함부로 출입한 사람은 죽음을 면치 못했고요.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도성 사방에 100리를 한계로 모두 금표를 세워 그 안에 있는 주현과 군읍을 폐지하고 주민을 내쫓은 다음 사냥터로 삼음으로써 경기도 일대 수백 리를 풀밭으로 만들어 금수를 기르는 마당으로 삼았고, 여기에 들어가는 자는 목을 베었다"고 해요. 이 밖에도 연산군은 충언하는 선비와 학자들을 간신으로 몰아 대규모 숙청을 하기도 했어요. 연산군은 결국 즉위 12년 만에 중종반정으로 폐위되고 강화도 옆 교동도로 유배됐어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저술가 기획·구성=박승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