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불타오른 런던… 더 타오른 민심

입력 : 2017.06.29 03:13

1666년 화재로 도심 80% 잿더미…
빵집에서 난 불 바람타고 번지는데 서로 책임 미루다 '골든타임' 놓쳐

진화 후 성난 민심 불 타올라 무고한 외국인을 사형에 처하기도
320년만에 빵집 후손이 사과했어요

영국 런던 서부의 24층 서민 아파트 '그렌펠 타워'에 지난 14일 화재가 발생해 600여 주민의 터전이 새카맣게 타버렸어요. 런던 경찰은 확인된 사망자만 79명(27일 기준)이며 파악하지 못한 사람까지 합치면 희생자가 더 있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이번 화재는 351년 전 발생했던 '런던 대화재'와 아주 닮은꼴인데요. 1666년 런던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볼게요.

◇화재와 전염병에 취약했던 런던

1660년대 런던은 좁고 구불구불한 길 사이로 주택이 무질서하게 들어서고, 도심에만 8만명이 밀집해 위생 상태가 아주 열악했어요. 1665년에는 하루에 1000여 명씩 죽어나간 '런던 대역병'이 돌기도 했죠. 성벽 안 주거지에는 대장간, 유리 제조소 등 화재 위험이 큰 작업장들이 6층 정도 주택과 공존했어요. 건물 1층은 주로 작업실이나 상점으로 쓰였고, 2층부터는 거주지였어요. 1층 너비에 따라 세금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1층은 좁게 만들고 2층부터 넓게 지었죠. 창문을 열어 이웃집과 악수할 수도 있었다고 해요. 건물 위층이 옆 건물과 가까우면 불이 빠르게 번지겠죠? 실제 런던에선 1666년 이전에도 몇 차례 화재가 있었는데 크게 번진 적이 없어서 별다른 후속 조치가 없었대요.

1666년 9월 2일 오전 1시. 런던 왕실에 빵을 조달하는 토머스 패리너란 제빵사의 빵집이 불길에 휩싸였어요. 건조한 날씨와 심한 가뭄으로 볏짚과 목재가 바싹 말라있던 데다, 설상가상으로 동쪽에서 강풍이 불어와 서쪽으로 불길이 금세 번졌어요. 시민·상인들의 조합 형태로 운영됐던 민간 소방서는 "불난 빵집은 조합 소속이 아니다"는 이유로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어요. 책임자인 런던 시장은 한술 더 떴죠. 집주인들이 없다는 이유로 화재 현장 주변 건물을 무너뜨리지 못하게 했어요. 게다가 불길을 보고 "여자가 오줌으로도 끌 수 있겠네"라는 망언을 남기고 자리를 떠버렸어요.

1666년 런던의 한 빵집에서 시작된 런던 대화재는 나흘 동안 집과 가게 1만3200채와 세인트폴 대성당까지 잿더미로 만든 뒤 겨우 진화됐어요. 런던 도심 ‘시티 오브 런던’의 80%가 불에 탔죠. 이후 대도시들이 근대적인 소방 체계를 갖추는 계기가 됐답니다.
1666년 런던의 한 빵집에서 시작된 런던 대화재는 나흘 동안 집과 가게 1만3200채와 세인트폴 대성당까지 잿더미로 만든 뒤 겨우 진화됐어요. 런던 도심 ‘시티 오브 런던’의 80%가 불에 탔죠. 이후 대도시들이 근대적인 소방 체계를 갖추는 계기가 됐답니다. /위키피디아

우왕좌왕하는 사이 불길은 더욱 번져 동이 틀 무렵 300여 채 건물이 불탔고 런던 브리지 북쪽까지 화마(火魔)가 옮겨가고 있었어요.

시민들은 불 끄는 것을 포기했어요. 물에 젖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집 안 귀중품을 꺼내 템스 강에서 배를 타고 도시를 떠났죠. 배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성벽 밖 공터로 피신했어요. 수레나 배를 이용해 비싼 값을 받고 물품을 운반해주는 장사치가 등장하는가 하면 빈집에 들어가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도 나타나는 등 도시는 대혼란에 빠졌어요.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다

1666년 런던 대화재 피해 지역 지도
날이 밝자 국왕 찰스 2세와 동생 제임스(훗날 제임스 2세)는 군대를 동원해 불길이 번지지 못하도록 주변 건물들을 무너뜨렸어요. 길거리로 나온 사람들에게 돈과 음식을 주며 즉석에서 소방관으로 고용했습니다. 화재 발생 나흘째에 바람이 약해지면서 불길은 겨우 진압됐어요. 4일간 화재로 집과 상점 1만3200채, 교회 87곳, 세인트폴 대성당 등이 사라졌어요. 런던 도심의 80%가 잿더미로 변해버렸고, 10만여 명이 살 곳을 잃었죠. 공식적인 사망자는 9명뿐이었어요. 가난한 서민 희생자는 집계하지도 않은 데다 시체가 불에 타버려 정확한 수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죠.

찰스 2세는 실의에 빠진 시민들에게 구호물자를 지원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지는 못했어요. 건조한 날씨, 거센 바람, 무능력한 시장 등으로 화재 원인을 돌려도 분노가 잦아들지 않았죠. 런던 시민들은 거리로 나가 외국인과 가톨릭교도를 무자비하게 폭행했어요. 성공회를 믿었던 영국 국민이 가톨릭에 대해 감정이 안 좋았고, 네덜란드와는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주요 표적이 됐어요. 참사 직후 '화재를 일으킨 프랑스와 네덜란드 놈들이 런던 시민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한다'는 유언비어가 돌아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죠. 찰스 2세는 시민들의 분노가 자칫 왕실에 대한 반란으로 이어질까 봐 이를 가만히 놔뒀어요.

런던에서는 방화범을 밝혀내기 위해 화재 조사 위원회가 결성되었어요. 빵집 주인은 자신의 오븐이 완전히 꺼져 있었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죠. 엉뚱하게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프랑스인 시계수리공 로베르 위페르가 범인으로 지목됐어요. 재판에 참석한 사람들은 위페르의 증언이 앞뒤가 안 맞았지만, 그가 외국인이고 가톨릭 신자니까 방화범이 확실하다며 사형을 선고했어요. 사형이 집행된 후에야 위페르가 화재 시작 이틀 후 런던에 도착했음이 알려졌어요. 위페르는 고문을 받아 거짓 자백을 한 것이었죠. 결국 320년이 지난 1986년, 화재가 시작됐던 빵집의 후손이 빵집 직원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했다고 인정하고 사과문을 발표함으로써 완전한 진상이 드러났어요.

1667년 1월 화재 조사 위원회는 "하느님의 징벌, 거센 바람, 건조한 날씨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사람들은 가톨릭 교인들이 범인이라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어요. 심지어는 화재 진압에 발 벗고 나선 제임스가 가톨릭 신자이므로 범인이라는 소문도 돌았죠. 1800년대 중반까지 런던 대화재를 애도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탑에 "불은 꺼졌지만, 이 재앙을 가져온 교황 세력의 광란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해요. 도시의 불길은 나흘 만에 진화됐지만 마음속 불길은 200여 년간 지속됐던 것이죠.

351년 전 영국인들은 안전 불감증에 빠져 안일하게 이익만 추구하다가 대화재를 맞이했어요. '그렌펠 타워' 화재 사건은 과거의 교훈을 잊고 인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일종의 경고일 수 있어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재앙은 우리 곁으로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겠죠?



공명진·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승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