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명옥의 명작 따라잡기] 영혼, 순수, 슬픔… 화가들이 사랑한 '파랑'

입력 : 2017.06.24 03:09

[색의 세계­ - 파랑]

동서고금 막론하고 사랑받은 色
파란 물감 한때는 황금보다 비싸… 특별한 인물 그릴 때만 사용

이희중, 파란색으로 이상향 표현
클랭 "세상은 온통 파랑"
피카소는 슬픔 표현할 때 썼어요

나라와 민족이 달라도 전 세계인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색이 있어요. 바로 파랑이죠. 파랑은 하늘, 바다, 영혼, 신성, 우주, 진실, 평화, 젊음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많은 사람이 파란색을 좋아하고, 화가들 역시 이 색을 즐겨 사용하곤 해요.

작품1은 한국 작가 이희중이 진한 파랑 '울트라마린'을 사용해 그린 밤 풍경화입니다. 부드러운 곡선의 산등성이에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휘어진 소나무와 산등성이 사이로 보름달이 떴어요. 낮에만 활동하는 하얀 나비 세 마리가 야생화 주변을 한가롭게 날아다니네요. 분명 밤인데 보름달이 떠있어서 그림 속 풍경은 전혀 어둡지 않아요. 왜 어두운 밤을 파란색으로 표현했을까요? 밤의 고요함과 신비함, 꿈결 같은 환상적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서예요. 이희중 작가는 색 중에서 파란색을 제일 좋아해요. 파란색이 현실 너머 이상 세계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죠. 이 밤 풍경화를 관찰하면 이희중 작가가 얼마나 파란색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어요. 합성 울트라마린과 흰색 티타늄 화이트 단 두 가지 색만을 섞어 밝은 파랑부터 어두운 파랑까지 수십 가지가 넘는 파란색을 만들어냈거든요. 예를 들면 가장 밝은 파랑은 울트라마린 0.1%와 흰색 99.9%, 가장 어두운 파랑은 울트라마린 99.9%와 흰색 0.1%를 섞어 만든다고 해요. 이희중 식의 색 배합으로 신비하고 오묘한 파란색들이 태어난 것이죠.

그림1~4
작품2는 17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화가 카를로 돌치가 성모 마리아를 그린 초상화입니다.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가 기도하는 모습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새파란 망토죠. 왜 파란색 망토를 걸쳤을까요? 파란색이 하늘과 영혼을 상징하는 종교적인 색이기 때문이죠. 성모 마리아에게 존경과 감사를 바치기 위해 파랑을 사용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어요. 화가들은 성모 마리아처럼 고귀하고 특별한 인물을 그릴 때만 가장 비싼 물감 울트라마린을 사용했어요. 광물성 안료인 울트라마린은 당시 황금보다 더 비싸고 귀한 물감이었죠. 보석에 버금가는 값진 청금석을 갈아 만들었는데 원산지가 바다 건너 먼 동방이었거든요. 오늘날도 울트라마린은 변함없이 화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어요. 합성 울트라마린이 개발된 이후부터는 일반 물감 가격으로 살 수 있게 됐어요.

프랑스 출신 이브 클랭은 파랑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파란색 물감을 직접 개발했어요. 작품3은 실제 지구본에 클랭이 개발한 파란색 물감을 색칠해 만든 겁니다. 클랭은 "세상이 온통 파랗게 보인다"고 외칠 만큼 파란색을 사랑했어요. 파랑이 정신적이고 절대적인 색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죠. 클랭은 화학자들과 다양한 약품을 실험한 끝에 미술가로서는 최초로 파란색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어요. 이 특별한 물감에 인터내셔널 클랭 블루(IKB)라는 이름을 붙이고 특허도 받았어요. 그런 다음 IKB 물감 단 한 가지만을 사용해 200점이 넘는 작품을 창작해서 미술계에 큰 충격을 던졌죠. 이브 클랭의 파란색 작품들은 한 가지 색상으로 이뤄진 미술사조 '모노크롬(단색화)'의 문을 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답니다.

현대미술의 황제로 불리는 파블로 피카소도 파랑에 매혹당한 화가였어요. 늙고 가난하고 눈먼 음악가가 홀로 외롭게 기타를 치는 모습을 그린 작품4는 온통 파란색으로 물들었어요. 1901~1904년 20대 초반 젊은 피카소는 거의 파란색만 사용해 그림을 그렸어요. '피카소의 청색 시대'를 대표하는 이 그림에서는 왠지 진한 슬픔이 느껴져요. 피카소의 우울하고 절망적인 감정이 그림에 배어 있기 때문이죠. 파란색은 대체로 밝은 기분과 연관되는 색이지만 우울하거나 슬픈 감정을 표현할 때도 사용됩니다. 영어로 "I am feeling blue"라는 표현은 기분이 좋지 않거나 우울하다는 뜻이거든요. 이 그림을 그리던 시절 피카소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어요. 고향 친구이며 절친한 동료 화가 카를로스 카사헤마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일어났기 때문이죠. 피카소도 부푼 꿈을 안고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건너왔지만 그림이 팔리지 않아 한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어요. 피카소는 마음의 상처와 현실의 고통을 파란색에 담아 표현한 것이죠.

화가들의 작품은 "같은 파란색이어도 똑같은 파란색이 아니다"는 점을 일깨워줘요. 오늘은 파랑을 사랑한 예술가들처럼 세상을 파랗게 바라보면 어떨까요?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기획·구성=박승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