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왕의 나라' 아닌 '신의 나라'를 택한 이란

입력 : 2017.06.22 03:10

[이란 혁명]

영국·미국 지원받은 팔레비 왕조, 급격한 서구화 추진해 국민 반발
국외로 추방된 성직자 호메이니, 1979년 이슬람혁명 성공 이끌어
모든 법이 이슬람 교리에 기초한 신정국가 세우고 최고지도자 등극

이란 수도 테헤란에 있는 국회의사당과 호메이니 묘에 지난 7일 무장 괴한이 침입해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했어요. 그 결과 17명이 숨지고 40여명이 부상했는데요. 이후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 단체 이슬람국가(IS)는 자신들이 테러를 저질렀다고 밝혔어요. 특히 호메이니의 묘소에서 테러가 발생해 이란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졌어요. 호메이니 묘는 이란 사람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혁명의 성지'이기 때문이죠.

◇팔레비 왕조의 서구화 정책

팔레비 왕조(1925~1979) 시절 이란은 급격한 서구화를 추진했어요. 영국의 지지를 받은 국왕 레자 샤(페르시아어로 왕이란 뜻)는 상비군을 두어 권력을 강화하고, 서구 국가처럼 사법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근대적 교육을 실시했죠. 교육과 사법 분야를 쥐고 있던 이슬람 성직자들이 크게 반발했지만 레자 샤는 반대 세력을 탄압하면서 개혁을 멈추지 않았어요. 1941년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는 친서방·반이슬람 색채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어요. 그는 보수 이슬람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토지 개혁, 문맹 퇴치, 여성 참정권 부여 등 근대적 개혁을 밀어붙였죠. 얼핏 보면 좋은 개혁 같지만, 팔레비의 목표는 이슬람 세력을 무력화하는 것이었어요. 문맹 퇴치로 국민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 이슬람 공동체에서 성직자들이 갖고 있던 영향력이 줄고, 토지 개혁으로 이슬람 공동체 소유 땅을 빼앗아 재정 기반과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죠. 또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면 남녀의 역할을 엄격히 따지는 이슬람의 권위도 떨어지게 돼요.

이슬람혁명이 일어나기 전 테헤란대학교 여대생들이 캠퍼스에서 자유로운 복장을 하고 있어요(왼쪽 사진). 1979년 혁명으로 이란이 종교와 정치가 결합된 신정(神政) 국가가 되면서 이란 여성은 외출할 때 몸과 머리카락을 가려야 해요. 2015년 테헤란의 한 카페에서 젊은 여성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오른쪽 사진).
이슬람혁명이 일어나기 전 테헤란대학교 여대생들이 캠퍼스에서 자유로운 복장을 하고 있어요(왼쪽 사진). 1979년 혁명으로 이란이 종교와 정치가 결합된 신정(神政) 국가가 되면서 이란 여성은 외출할 때 몸과 머리카락을 가려야 해요. 2015년 테헤란의 한 카페에서 젊은 여성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오른쪽 사진). /파르스타임스, 블룸버그

사실 팔레비 왕조는 근대화를 추진한다면서 왕권을 강화해 민주화에 역행했어요. 또 이란의 석유 채굴권을 영국 기업에 넘겨준 대가로 서방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죠. 1951년 반(反)외세 민족주의를 주장하며 총리로 선출된 모하메드 모사데크는 석유를 국유화해서 외세의 경제 침탈로부터 벗어나려 했어요. 그러나 모사데크는 팔레비와 영국·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군부 쿠데타로 실각하고 말아요. 이때부터 미국이 이란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고, 미국에 대한 이란 국민의 반감이 커졌어요.

이슬람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 운동이 거세지면서 중심인물로 떠오른 이가 아야톨라(시아파 고위 성직자) 루홀라 호메이니였어요. 팔레비 정부는 1964년 11월 새벽 4시에 아침 예배에 참석하러 사원으로 향하는 호메이니를 납치해 공항으로 데려가 국외로 추방시켜버렸죠. 호메이니는 15년간 이란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라크와 프랑스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반정부 투쟁을 이끌어요.

◇호메이니와 이란 이슬람공화국

호메이니는 국외에서 육성 녹음테이프나 편지를 통해 이란 사람들에게 투쟁의 방향을 제시했어요. 이란의 종교 지도자들과 대학생들은 이에 호응해 반정부 투쟁을 이어갔죠. 1977년 11월 29일 호메이니의 아들이 협심증으로 사망했다고 이란 정부가 발표했어요. 이란 국민은 국왕이 암살한 것이라고 믿었죠. 호메이니 아들에 대한 추도 물결은 반정부 시위에 기름을 부었어요. 이란 국민의 불만은 1978년 1월 폭발하고 말았어요. 이란 북부에서 대학생들이 벌인 반정부 시위에 경찰이 총격을 가해 학생 4명이 사망한 거예요. 이에 호메이니는 전국의 이슬람 사원에서 이 학생들의 죽음을 기리는 집회를 40일마다 한 번씩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그때마다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어요.

1979년 이란혁명 당시 테헤란 시민들이 ‘샤(왕) 기념탑’ 주변에 모여들어 구호를 외치고 있어요. 군중 틈에는 종교지도자 호메이니의 대형 사진이 들어간 피켓이 여럿 보여요. 혁명이 성공한 후 이 탑은 ‘아자디(자유) 기념탑’으로 이름이 바뀌었죠.
1979년 이란혁명 당시 테헤란 시민들이 ‘샤(왕) 기념탑’ 주변에 모여들어 구호를 외치고 있어요. 군중 틈에는 종교지도자 호메이니의 대형 사진이 들어간 피켓이 여럿 보여요. 혁명이 성공한 후 이 탑은 ‘아자디(자유) 기념탑’으로 이름이 바뀌었죠. /위키피디아
1978년 라마단(이슬람교에서 매년 한 달 해가 떠 있는 동안 금식하는 의식) 기간에 반정부 투쟁은 절정에 달했어요. 라마단의 마지막 날(9월 8일) 전국에서 수백만 명의 국민이 시위에 나서 호메이니의 귀국과 이슬람 공화국의 설립을 요구했어요. 팔레비 정부는 주요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와 야간 통행을 금지시켰죠. 테헤란에 5000여명의 시위대가 모이자 정부군이 헬기와 탱크로 무자비하게 진압해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어요. 이란 국민은 이날을 '검은 금요일'이라고 부르며 지금까지 애도하고 있어요. 12월 11일 전국적으로 최소 600만명이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어요. 당시 이란 인구가 약 3700만명이었으니 인구의 15% 이상이 길거리로 나온 것이죠. 엄청난 규모의 시위가 이어지자 정부군은 분열했고, 미국도 더 이상 이란 정부가 혁명을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어요. 팔레비 왕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1979년 1월 15일 이집트로 탈출했어요. 호메이니는 2월 1일 테헤란에 입성해 정부청사, 방송국, 왕궁 등을 완전히 장악했어요. 그는 왕정을 폐지하고 이슬람공화국으로 전환을 묻는 국민투표를 치러 무려 98.2%의 찬성표를 얻었어요. 4월 1일 세계 유일의 이슬람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호메이니는 최고 지도자에 올랐죠. 이슬람 교리에 기초한 헌법도 통과시켰어요. 이전까지 자유로운 복장으로 다니던 이란 여성은 이제 머리에 히잡을 쓰고 몸을 가려야 하죠. 오늘날까지 이란은 종교 지도자가 국가 최고 지도자를 겸하는 신정(神政)국가로 남아 있어요.

공명진·숭문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박승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