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클래식 따라잡기] 포성 속에서 태어난 명곡들

입력 : 2017.06.17 03:07

[전쟁과 음악]

고통스럽고 처절한 전쟁의 경험이 삶에 대한 애착과 예술혼 일깨워
베토벤, 포화 쏟아져도 작곡에 몰두… '황제' '전쟁교향곡' 등 만들었어요

6월은 현충일과 6·25 등 유독 전쟁과 관련된 기념일이 많아요. 방학을 앞두고 즐거운 시기지만 숙연한 자세로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는 달이기도 해요.

전쟁은 음악가들에게도 큰 고통을 줬죠. 하지만 살기 힘들고 때론 목숨마저 위태로운 때 탄생한 작품들 가운데 그 작곡가를 대표하는 걸작이 나오기도 했어요. 인생에 대한 강한 애착과 생명의 소중함을 실감해서일까요. 오늘은 클래식 음악 역사에 등장하는 전쟁과 관련된 작품들을 모았어요.

◇나폴레옹에게 영감 받은 베토벤

처음 소개할 곡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입니다. 악상이 당당하고 품격이 넘쳐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곡이죠. 베토벤은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809년에 이 곡을 쓰기 시작했어요. 당시 베토벤이 살던 오스트리아 수도 빈은 날로 위세를 떨치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어요.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귀족들이 대부분 빈을 떠났지만 베토벤은 포성이 울리는 전쟁통에서도 창작에 집중했고 결국 멋진 협주곡을 탄생시켰어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피하지 않겠다는 용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이 베토벤의 마음속에 자리했기 때문이었죠. 사실 이보다 몇 년 앞서 베토벤이 만든 교향곡 3번 '영웅'은 본래 나폴레옹에게 바치려던 곡이었어요. 작곡을 막 마칠 무렵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을 듣고 분노한 베토벤은 헌정 계획을 취소했어요. 영웅이라 믿었던 나폴레옹이 스스로 권력을 탐하는 못난 사람으로 변했다고 생각했죠.

나폴레옹(가운데 백마 탄 사람)이 전쟁터에서 말을 타고 달리고 있어요.
나폴레옹(가운데 백마 탄 사람)이 전쟁터에서 말을 타고 달리고 있어요.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을 폐허로 만들었지만 훗날 베토벤, 차이콥스키 등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명곡들이 탄생하는 밑거름이 됐어요.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
나폴레옹이 영감을 준 작품은 또 있어요. 베토벤이 1813년 발표한 '웰링턴의 승리' 혹은 '전쟁 교향곡'이라고 불리는 작품 번호 91입니다. 이 곡은 그해 비토리아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물리친 영국 장군 웰링턴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작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1부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치열한 전투 장면을 타악기와 금관악기 연주로 표현하고 있고, 2부는 승리를 거둔 영국군을 축하하기 위해 영국 국가를 주제로 한 다양한 변주가 나타납니다.

프랑스군의 러시아 침공을 계기로 만들어진 곡도 있어요.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입니다.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은 1812년 모스크바로 진격하지만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 추위에 어려움을 겪죠. 러시아군과 시민들은 스스로 식량과 땔감을 불태우고 고통을 참아가며 프랑스군을 고립시켜 결국 승리를 거둬요. 이 승리의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곡이 바로 '1812년' 서곡입니다.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며 대규모 관현악단과 합창, 실제 전투에서 사용되는 대포가 등장하죠. 러시아 정교에서 부르는 성가와 러시아 민요, 양국의 국가 등이 흥미로운 전개를 보이면서 힘차고 화려한 절정을 만듭니다.

◇삶의 위기에서 태어난 명곡들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창작의 전성기에 제1차 세계대전을 겪었죠. 서른아홉 살이던 1914년 그는 징집영장을 받았고 애국심에 불타올라 어쩌면 마지막 작품이 될지 모르는 피아노 3중주곡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4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은 그의 어머니가 태어난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민속 선율을 바탕으로 매우 극적인 변화와 섬세한 악상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어느 한 부분 흠을 잡기 어려울 정도로 꼼꼼하고 명쾌한 이 작품은 작곡가의 마음속 깊은 삶에 대한 절박함이 느껴지는 걸작입니다. 치열한 베르덩 공방전에 운전병으로 참전했던 라벨은 다행히 무사히 제대할 수 있었는데요. 그 후 여섯 곡으로 된 피아노 모음곡 '쿠프랭의 무덤'을 통해 전쟁에서 세상을 떠난 자신의 동료를 위로하고 추모했죠. 작품마다 친구들의 이름이 붙어 있는 이 모음곡은 바로크 시대의 분위기와 현대적인 매력이 함께합니다.

30대 시절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조국인 소련으로 돌아가 거기서 생애를 마친 특이한 경력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는 1939년 피아노 소나타 세 곡을 연달아 발표하며 조국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죠. 모두 아홉 곡인 그의 소나타 중 6, 7, 8번은 2차 세계대전 기간에 쓰여 '전쟁 소나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데요. 당시 연합군이었던 소련의 승리를 기원하는 마음과 함께 기계 문명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대량 살상과 인간성 몰락에 대한 비판, 살아남은 이들을 위로하는 따뜻한 분위기의 악상 등을 담고 있습니다.

위대한 걸작은 평온한 시기보다 오히려 삶이 벼랑 끝에 몰린 위급한 상황에서 더 많이 나타난 듯합니다. 작곡가들의 뜨거운 의지와 예술혼이 담겨 있는 곡들을 감상하면서 뜻깊은 6월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김주영 피아니스트 기획·구성=박승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