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신라와 백제 사이… 철기 문화 꽃피운 500년 역사
입력 : 2017.06.13 03:09
[가야]
낙동강 하류 6개 부족국가 뭉쳐
농업과 철기 산업 발전으로 융성… 중국·일본에까지 철 수출했어요
주변국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으나 강력한 통일국가 이루지 못해 562년 신라에 흡수되고 말았어요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청와대 회의에서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가야사의 연구와 복원은 영남과 호남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사업"이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우리 민족의 고대 역사 중 하나인 가야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것이죠. 지금까지 가야는 낙동강 일대와 김해 지역에 있었던 나라들로 알려졌어요. 고대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역사에 흡수되다시피 해, 그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어요. 가야는 어떤 나라였으며 우리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요?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서기 42년 3월,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에 있는 구지봉이라는 작은 산봉우리에 3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이상한 행동을 벌였어요. 흙을 파헤치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는데 노랫말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약에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서기 42년 3월,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에 있는 구지봉이라는 작은 산봉우리에 3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이상한 행동을 벌였어요. 흙을 파헤치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는데 노랫말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약에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 ▲ /그림=정서용
이것은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가야라는 나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려주는 건국신화예요. 그때 가야 백성들이 부른 노래를 구지가(龜旨歌)라고 하죠. 여섯 가야는 김해의 금관가야를 비롯해 성주의 성산가야, 고령의 대가야, 진주의 고령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성의 소가야입니다. 이들 여섯 나라가 초기에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에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 왕국을 이뤄 발전했지요.
◇농업과 철기 문화가 발달했던 가야
가야는 삼한시대 변한이라는 부족국가가 발전해 이뤄진 나라였는데, 당시 변한은 낙동강 하류 지역에 있었어요. 이 지역은 기름진 평야여서 가야는 농업이 크게 발달했죠. 또 변한은 철 생산이 활발했는데 가야가 그 뒤를 이으며 철기 생산과 기술을 발전시켰어요. 가야는 철갑옷, 무기 등 품질 좋은 철기 제품을 낙랑, 대방 등 중국 한사군과 왜국(일본)에 수출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기술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가야는 우수한 문화를 발달시켜 신라를 위협할 정도로 힘센 나라로 성장했어요.
그러나 가야는 고구려·백제·신라처럼 강력한 통일 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6개 작은 부족국가의 연맹체로 남았어요.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금관가야가 서기 400년경 백제·왜국과 함께 신라를 공격했다가 오히려 신라를 도우러 온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큰 피해를 당해 세력이 약해졌죠. 이후 금관가야 대신 고령 지역의 대가야가 우두머리 노릇을 하며 지리산과 섬진강 주변으로 세력을 넓힌 적도 있어요. 그러나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멸망하고, 다른 가야 나라들도 차례차례 신라에 흡수됐어요. 결국 대가야마저 554년 백제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했다가 크게 패하고, 562년 신라에 정복당하며 가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아요.
◇영·호남 아우르며 세력 펼치기도 했지만
500년의 역사를 이어갔던 가야는 고구려·백제·신라와 더불어 엄연히 고대 한반도 국가 중 하나였어요. 많은 역사학자들은 삼국시대의 역사에서 가야의 역할이나 중요성이 결코 작지 않다고 보고 있죠. 특히 신라와 구별되는 가야의 문화는 백제와 신라, 왜국 등 주변 나라들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져요.
그러나 가야인 스스로 남겨놓은 역사적 기록이 거의 없고, 훗날 역사가들이 "가야가 신라의 일부였다"는 '삼국사기' 등의 주장을 받아들여 가야사는 교육이나 복원 사업에서 별 관심을 받지 못했어요. 최근 영남 지역뿐 아니라 섬진강 주변의 광양, 순천만, 남원 등 호남 지역과 금강 상류 지역에서도 가야 유적과 유물이 나오면서, 가야가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어요.
☞가야 문헌 기록
가야는 문헌 기록에 가야(加耶·伽耶·伽倻)·가라(加羅)·가량(加良)·가락(駕洛)·구야(狗邪·拘邪)·임나(任那) 등 여러 명칭으로 나와요. 가야에 관한 역사 기록은 고려 초 '가락국기'가 있었는데 오늘날 전해지지 않아요. 고려 말 일연이 쓴 삼국유사 '기이편'에 가락국기의 내용이 간략히 요약돼 있을 뿐이죠. 삼국사기에도 "가야는 신라의 전쟁과 협상 대상이었다"는 단편적 기록만 나와요. 일본인들이 기록한 일본서기에도 가야가 언급됐지만 '임나일본부설' 등 왜곡이 많아요. 4~6세기 일본이 가야(임나)에 통치기관을 두고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인데, 근거 없는 얘기로 밝혀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