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동물 이야기] 낙타 중 가장 작은 종(種)… '신이 내린 털' 가졌어요

입력 : 2017.06.08 03:07

비쿠냐

'낙타' 하면 등에 볼록한 혹이 있고, 몸집이 말(馬)만큼 크고, 사막에 사는 동물을 떠올려요. '비쿠냐(Vicuna)'는 등에 혹도 없고 키가 75~85㎝에 몸무게 35~65㎏으로 노루만 한 크기지만, 엄연히 낙타예요. 낙타 중에 가장 작은 낙타지요. 페루, 칠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에 걸친 해발 3200~4800m 안데스 고산지대에 살아요. 페루에선 국가를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수컷 대장 한 마리가 암컷 5~15마리와 그에 딸린 새끼들을 거느리죠. 일반 낙타처럼 물과 먹이 없이 오래 버티지 못하지만, 낮과 밤의 온도 차가 수십 도에 달하는 극한 환경에서 끄떡없이 살아요. 먹을 게 별로 없는 고산지대에서 비쿠냐는 소화하기 어렵고 영양가도 적은 다년생 '페스튜카' 풀을 꾹꾹 씹어먹고 생존해요.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에 사는 비쿠냐.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에 사는 비쿠냐. 낙타과(科) 동물 가운데 가장 몸집이 작지만 따듯한 털이 있어 고산지대에서도 끄떡없어요. /위키피디아
원주민들은 비쿠냐의 보드라운 털을 '신이 내린 털'이라 불렀대요. 비쿠냐 털은 지름이 12㎛ 정도로 고급 캐시미어 털(약 14㎛)보다 더 가늘고 부드러워요. 가슴 부위에는 지름 75㎛의 하얀 털이 수북해 폐와 심장을 따뜻하게 보호해줘요. 털이 빽빽하고 보온성도 뛰어나, 고산지대의 찬 바람이 피부에 닿지 않게 막아줘요. 과거 이 지역에 정착한 잉카제국과 안데스 원주민은 비쿠냐가 사는 지역에 살면서 비쿠냐에서 고기와 털을 얻었어요. 비쿠냐 털이 매우 좋고 귀해 잉카제국에서는 왕실 사람이 아니면 비쿠냐 털옷을 입지 못하게 했어요. 당연히 사냥도 엄격하게 제한해 안전하게 쓸 만큼 비쿠냐의 개체 수를 유지했죠.

비쿠냐 서식지
그러나 유럽인들이 이주한 후 비쿠냐를 마구 사냥해 1960년대에는 비쿠냐가 6000마리로 줄어 멸종 위기에 몰렸어요. 다행히 페루 정부와 국제단체들이 1974년 비쿠냐를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하고 보전에 힘쓰면서 다시 10만마리 이상으로 늘어났죠.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 일러요. 지금도 비쿠냐 털옷은 인기 있는 상품이라 찾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죠. 과거에는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의 핵심 참모가 비쿠냐 털옷 한 벌을 거절하지 못하고 뇌물로 받았다가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지요. 더구나 비쿠냐는 번식도 느린 편이에요. 암컷은 임신 11개월 만에 새끼를 한 마리만 낳아요.

'황금 코트' '신의 직물'이라고 찬사받는 비쿠냐 털은 상아나 진주처럼 자연의 선물인 셈이에요. 안데스 지역 사람들은 '꿩 대신 닭'처럼 비쿠냐 대신 알파카를 가축화해서 그 털을 얻고 있어요. 언젠가 비쿠냐 털보다 뛰어난 제품을 만드는 기술이 나오면 비쿠냐가 사냥당할 걱정 없이 자연에서 마음껏 뛰어다닐 거예요. 실제로 나일론에서 시작한 섬유·직물 기술은 고어텍스와 같은 고기능성 제품을 만들어내며 자연과 동식물 보전에 큰 기여를 했어요. 즉 과학기술은 자연 보전의 핵심 동력이기도 합니다.


김종민 전 국립생태원 생태조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