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살기 위해 타협하느니 '사형'을 선택한 철학자
입력 : 2017.06.08 03:07
[소크라테스 재판]
잦은 설전으로 집권자에 밉보여… 아테네 패전 후 희생양으로…
"젊은이들 타락시킨 죄" 고발당해
시민 찬반투표로 유무죄 판결
순순히 감형 받을 수도 있었지만 고발 내용 인정 않고 독 마셨어요
지난 3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파면당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이후 전직 대통령이 구속돼 법정에서 재판받게 되자 많은 사람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해하고 있지요. 첫 재판 방청객으로 68명을 받는데 525명이나 몰릴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목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겠죠?
사실 오늘날엔 수많은 재판이 매일같이 이뤄지고 있어요. 한 사람의 인생이 재판 결과에 따라 극과 극으로 갈릴 수도 있죠. 오늘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의 재판에 대해서 살펴볼게요.
◇아테네 몰락의 희생양이 된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서양철학의 뿌리와 같은 사람이에요. 인간의 존재와 내면에 대해 탐구했어요. 인간은 '알지 못함'을 깨닫는 순간 앎으로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가 있었기에 제자인 플라톤을 거쳐 아리스토텔레스, 먼 훗날 데카르트와 칸트를 거쳐 현대까지 인간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가 이뤄질 수 있었죠.
사실 오늘날엔 수많은 재판이 매일같이 이뤄지고 있어요. 한 사람의 인생이 재판 결과에 따라 극과 극으로 갈릴 수도 있죠. 오늘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의 재판에 대해서 살펴볼게요.
◇아테네 몰락의 희생양이 된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서양철학의 뿌리와 같은 사람이에요. 인간의 존재와 내면에 대해 탐구했어요. 인간은 '알지 못함'을 깨닫는 순간 앎으로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가 있었기에 제자인 플라톤을 거쳐 아리스토텔레스, 먼 훗날 데카르트와 칸트를 거쳐 현대까지 인간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가 이뤄질 수 있었죠.
-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운데 흰 옷 입은 사람)가 독약을 마시고 죽기 직전 제자와 동료들에게 마지막 말을 하고 있어요.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신의 가르침이 잘못됐다 인정하면 사형을 피할 수 있었지만“품위와 위엄을 잃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면서 독배를 택했어요. /위키피디아
◇찬반 투표로 유죄·무죄를 선고한 민중재판
그리스 세계를 대표하는 아테네에는 오늘날 배심원 제도에 가까운 민중재판소가 운영되고 있었어요. 재판은 극장에 모인 민중재판관들이 찬반 투표를 해서 투표수의 많고 적음으로 판결을 내리는 방식이었어요. 민중재판관은 아테네 시민들이 1년 임기로 돌아가며 맡았어요. 재판을 열려면 시민 개인이 고발해야 했죠. 고발이 접수되고 재판이 시작되면 고발인이 고소한 이유에 대해 설명한 다음 피고인이 변론했어요. 이 과정이 끝나면 고발인과 피고인이 각각 증인을 불러와 신문하고, 민중재판관들이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민중재판관들은 유죄라고 생각하면 구멍이 있는 도자기 조각을, 무죄라고 생각하면 구멍이 없는 도자기 조각을 투표함에 넣었어요.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이유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인정한 신을 거부하고 새로운 신을 믿게 했다"는 것이었어요.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고발이 부당하다는 점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반박했어요.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유무죄를 판가름할 민중재판관들에게 무례한 말을 많이 해 오히려 분노를 일으켰죠. 그래서 유죄 280표, 무죄 220표로 사형을 선고받아요.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소크라테스
유죄·무죄 사이 표 차이가 크지 않았기에 소크라테스는 민중재판관들을 설득해 사형보다 가벼운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어요. 당시 법에 따라 피고인은 유죄 평결 후 최후 변론에서 구류, 벌금, 추방, 침묵 강요 등 네 가지 중 하나를 요청할 수 있었죠. 소크라테스는 최후 변론에서 "가벼운 벌금만 내게 해 달라"고 했어요. 문제는 그가 뉘우치는 기색 하나 없이, 푼돈에 지나지 않는 금액을 벌금으로 내겠다면서 민중재판관들의 심기를 더욱 건드린 것이에요. "국비로 나에게 평생 향응을 제공하라"는 조롱 섞인 요구까지 하려는 것을 제자들이 만류했어요. 민중재판관들은 더욱 분노해 소크라테스에게 사형 360표, 벌금형 140표란 압도적 차이로 사형을 확정했어요.
사형수가 된 소크라테스는 감옥에 갇혀 사형 집행을 기다렸어요. 친구가 찾아와 아테네를 탈출해 다른 도시로 망명하라고 조언했지만 소크라테스는 "내가 도망치면 고발 내용이 모두 사실임을 인정하는 꼴"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러고는 결국 담담하게 독약을 들이켜 생을 마감했어요.
현대 재판 제도와 비교해봤을 때 아테네 재판 방식의 허술함을 몇 가지 찾아볼 수 있는데요. 우선 피고인에게는 고발인과 증인에게 반대로 질문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어요. 민중재판관들이 투표 이전에 토론하며 의견을 나누는 과정도 없었고요. 대부분 하루 만에 재판이 끝나기 때문에 민중재판관들은 이성적 판단보다는 재판 과정에서 느낀 감정으로 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죠.
만약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목소리를 낮추고 불의, 허위와 타협해 목숨을 구걸했다면 살 수는 있었겠죠.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까지 기억할 정도의 명예와 존경은 결코 얻지 못했을 것이에요. 어쩌면 그는 자신의 죽음이 옳았음을 역사 속에서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이 소크라테스였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소피스트(Sophist)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 아테네를 중심으로 활동한 그리스 지식인·철학자들을 일컫는 말이에요. 소크라테스가 살던 아테네에서 소피스트들은 비싼 수업료를 받고 주로 웅변술, 논증법 등을 가르쳤어요. 때론 지나치게 논쟁적이어서 소피스트란 말은 오늘날'궤변론자(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따져 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라는 의미를 갖게 됐죠. 이들에 비해 소크라테스는 보수도 받지 않으면서 대화 속에서 지식을 스스로 깨닫도록 이끌어, 청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어요. 이런 이유로 아테네의 주류 소피스트들이 소크라테스를 싫어했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