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93세 팔면봉·84세 일사일언… 오래도록 사랑받은 조선일보 연재물들

입력 : 2017.06.05 03:01

6702회 연재한 '이규태 코너'… 독자들 아침 스크랩 습관 만들어
1924년 시작된 1면 '팔면봉'… 짧은 독설로 일제 저항 뜻 담아

지금 여러분이 들고 있는 조선일보 신문의 1면을 한번 봐 주세요. 오른쪽 아래 '八面鋒(팔면봉)'이란 제목의 코너가 보일 거예요. 그날 중요한 뉴스 몇 개를 골라 아주 짧은 문장으로 촌평(寸評)을 하는 코너입니다. 그런데 이 코너는 언제부터 조선일보에 실리기 시작했을까요?

무려 93년 전이랍니다. 1924년 10월 3일 자부터 1면에 싣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어요. '팔면봉'이란 제목의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옛 지식인들 사이에서 '세상사 여러 분야에 관해 솜씨 있게 펴낸 글'이란 뜻으로 쓰였다고 해요. '팔면(八面)'은 동양 사상에서 '모든 방면'을 뜻하고, '봉(鋒)'이란 '힘 있는 글'을 뜻하는 '필봉(筆鋒)'의 줄임말입니다.

조선일보 지면에 23년 동안 6702회에 걸쳐‘이규태 코너’를 연재했던 고(故)이규태 조선일보 논설고문이 생전에 자택 서재에서 책에 둘러싸여 신문을 보고 있는 모습이에요.
조선일보 지면에 23년 동안 6702회에 걸쳐‘이규태 코너’를 연재했던 고(故)이규태 조선일보 논설고문이 생전에 자택 서재에서 책에 둘러싸여 신문을 보고 있는 모습이에요. /이덕훈 기자
'촌철살인(寸鐵殺人)'이란 말을 들어보신 적 있나요? 짧은 글이나 말로 급소를 찌르거나 감동시킨다는 말이에요. 바로 이 촌철살인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팔면봉'입니다. 억압받던 일제하에서 이런 코너를 신설한 것은 짧은 독설로 일제에 저항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죠.

1924년 처음 나온 팔면봉이 무엇이었는지 보면 그런 뜻을 알 수 있어요. "공갈, 사기, 횡령, 문서 위조 등을 전문으로 하는 자가, 부업으로는 부산경찰서 보안주임질도 하엿다나"라고 썼어요. 부패 경관을 비판한 것이었어요. 그 엄혹한 시기에 매일 이런 글을 싣고도 무사했을 리가 없죠. 가시 돋친 독설을 내놓던 '팔면봉' 기사는 일제에 의해 4차례나 압수당했습니다. 이후 '팔면봉'은 한때 짧은 시사칼럼 형식도 취했지만 1952년 6월 19일 자부터 '촌평 묶음'으로 정착됐어요. 지금은 편집국 정치부·사회부·국제부에서 매일 한 건씩 쓰고 있답니다.

지령 3만호를 눈앞에 둔 조선일보에는 이처럼 무척 오래된 연재물들이 있습니다. 오피니언 면에 실리는 '萬物相(만물상)'도 그중 하나랍니다. 61년 전인 1956년 4월 1일 첫 회가 나간 칼럼입니다. 언론인이자 역사가로 유명한 당시 조선일보 논설위원 천관우(1925~1991)가 첫 회를 썼어요. 금강산 최고 경승지에서 이름을 따 '그곳의 조화와 무궁을 떠올리며 역사의 물결의 부침(浮沈)하는 현실의 천태만상을 그리겠다'는 것이 그가 첫 회에서 밝힌 작명 이유였습니다.

1924년 10월 3일 자 조선일보 1면에 첫 번째‘팔면봉’이 실렸어요.
1924년 10월 3일 자 조선일보 1면에 첫 번째‘팔면봉’이 실렸어요. /조선일보 DB
'만물상'은 세계사의 큰 물줄기부터 뒷골목 하찮아 보이는 얘기까지 온갖 주제를 다뤘습니다. 절박한 주제라도 경쾌하고 통쾌하게 읽히도록 하고, 시대를 꿰뚫는 통찰과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지식을 안에서 숙성시켜 향기로운 글로 펼쳐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해요. 고병익, 최석채, 선우휘, 이어령, 홍사중 같은 명칼럼니스트가 돌아가며 이 칼럼을 썼습니다.

매일 문화 면 지면에 실리는 '일사일언(一事一言)'도 빼놓을 수 없는 오래된 연재물이에요. 200자 원고지 4~5장 분량으로 매달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필진들이 참여해 일상 속 살아가는 이야기와 삶의 지혜를 잔잔하게 펼쳐내는 칼럼입니다. 이 연재물이 처음 지면에 등장한 것은 84년 전인 1933년이었습니다. 소설가 이광수, 국어학자 이희승을 비롯한 한국 현대 문화사의 쟁쟁한 인물들이 필진으로 등장했지요.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문화계 논객'으로 진입하는 관문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1983년부터 2006년까지 6702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이규태 코너'는 '한국학의 보고(寶庫)'라 불리며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코너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조선일보를 펼치면 꼭 '이규태 코너'부터 먼저 읽고 스크랩을 했다"는 사람들을 지금도 흔히 만날 수가 있습니다. 조선일보 기자로 1968년 대형 연재물 '개화백경'부터 모두 37개 시리즈를 연재했던 필자 이규태(1933~2006)는 방대한 장서와 치밀한 연구를 바탕으로 이 코너를 쓸 수 있었습니다.

2006년 2월 23일 자에 실린 이규태 칼럼의 마지막 회는 "20년간 휴간일 빼놓고는 매일같이 글을 써야 했기 때문에 마치 마라톤을 달리는 선수와도 같은 입장이었습니다"라며 "이제는 골인 지점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고 썼습니다. 그는 이 칼럼이 실린 지 이틀 뒤인 2월 25일 별세했습니다. 사람들은 "박물관 하나가 사라져버린 기분이다" "손바닥만 한 칼럼에 실린 온고지신(溫故知新)이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눈을 뜨게 했다"며 그를 애도했습니다.


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