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고종의 '내탕금' 51만마르크는 어디로 사라진걸까
입력 : 2017.06.06 03:06
[왕의 개인 재산]
조선 왕실의 개인 재산 내탕금, 격려금·왕실 결혼 비용 등에 사용
흉년 들면 구호사업에 쓰이기도
고종이 독일계 은행에 맡긴 내탕금
최측근 헐버트가 찾으러 갔을 때는 일제가 몰래 인출해 간 뒤였지요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특수활동비 53억원을 절약해 청년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고 소외 계층을 지원하는 데 쓰겠다고 밝혔어요. 그동안 청와대 특수활동비로 처리하던 대통령 가족의 식사비와 생활비 등도 앞으로는 대통령 월급에서 처리하기로 했고요. 대통령 개인에게 필요한 비용을 정부 예산인 특수활동비로 내지 않고 대통령 개인 재산으로 계산하겠다는 거예요.
특수활동비는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범죄 수사, 첩보, 그 외 여러 정부 활동에 사용되는 예산입니다. 일반적인 정부 예산은 사용 내용을 모두 기록으로 남겨야 하지만, 특수활동비는 비밀 업무에 사용되기 때문에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 따로 기록하지 않아요. 그래서 종종 정부 업무 외 다른 용도로 잘못 사용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답니다.
옛날 왕조 시대 임금들은 국가 재정을 자신의 돈처럼 썼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특히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개인 재산과 국가 재정을 명확히 구분하였답니다.
◇임금들의 개인 재산 '내탕금'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왕도 개인 자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요. '내탕금(內帑金)'이라는 이름으로 왕과 왕실의 개인 재산을 인정하고 국가 재정과 확실하게 구분을 지은 건 조선시대부터였지요.
특수활동비는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범죄 수사, 첩보, 그 외 여러 정부 활동에 사용되는 예산입니다. 일반적인 정부 예산은 사용 내용을 모두 기록으로 남겨야 하지만, 특수활동비는 비밀 업무에 사용되기 때문에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 따로 기록하지 않아요. 그래서 종종 정부 업무 외 다른 용도로 잘못 사용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답니다.
옛날 왕조 시대 임금들은 국가 재정을 자신의 돈처럼 썼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특히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개인 재산과 국가 재정을 명확히 구분하였답니다.
◇임금들의 개인 재산 '내탕금'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왕도 개인 자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요. '내탕금(內帑金)'이라는 이름으로 왕과 왕실의 개인 재산을 인정하고 국가 재정과 확실하게 구분을 지은 건 조선시대부터였지요.
- ▲ /그림=정서용
하지만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하고 '왕과 왕실의 재산은 국가 재정과 구별되는 개인 재산'이라고 선포하면서 내탕금이 생겨났습니다. 이후 궁궐의 내시들로 이루어진 '내수사'라는 기관에서 내탕금을 관리하였지요.
내탕금은 국가 재정과 달리 별도의 회계 감독을 받지 않았고 따로 사용처를 밝히지도 않았어요. 이렇게 보면 오늘날 특수활동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요. 하지만 국가 재정이 아니라 왕의 개인 재산이었기 때문에 신하들은 내탕금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했고, 왕이 내탕금을 쓰는 것에 간섭할 수도 없었습니다.
◇내탕금은 어떻게 쓰였을까?
조선시대 왕들은 내탕금을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였어요. 주로 공을 세운 신하에게 격려금을 내리거나 왕자·공주의 결혼 비용으로 사용하였지요. 효종과 영조는 흉년이 들거나 천재지변으로 굶주리는 백성이 늘어나자 부족한 국가 재정을 대신해 내탕금으로 구호 사업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할 때 막대한 액수의 내탕금을 사용하기도 했고요.
몇몇 왕은 내탕금으로 절을 짓기도 했어요. 조선은 유학을 따르고 불교를 멀리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국가 재정으로 절을 지으려고 하면 신하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탕금으로 절을 세우면 신하들의 간섭과 반대를 피할 수 있었지요.
조선 말 고종은 내탕금으로 경복궁 내에 따로 건청궁이라는 궁궐을 짓기도 했어요. 1897년 대한제국을 수립한 이후에는 내수사를 내장원으로 승격시키고 국가 재정으로 관리하던 땅과 인삼 전매 사업, 철도·광산 사업 등을 내장원이 관리하도록 하였지요. 이렇게 국가 재정을 내탕금으로 끌어들이자 1년간 지출된 내탕금이 국가 재정 지출보다 더 커지게 되었답니다.
고종은 이 내탕금으로 근대적 교육기관을 세우거나 네덜란드 헤이그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특사를 보내기도 하였지요. 하지만 궁궐 개·보수나 각종 황실 행사 등 황실의 권위를 과시하는 데 내탕금을 낭비했고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는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그 많던 내탕금은 어디로 갔을까
막대한 내탕금을 갖고 있던 고종은 독일 공사관의 소개로 중국 상하이에 있던 독일계 은행 '덕화은행(오늘날 도이치뱅크)'에 오늘날 가치로 약 250억원에 달하는 51만마르크의 내탕금을 예금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1909년 고종의 외교자문관이자 최측근 인사였던 미국인 호머 헐버트가 내탕금을 다시 찾으러 갔을 때는 이 돈이 모두 사라져버렸답니다. 덕화은행은 "이미 다른 사람이 돈을 찾아갔다"는 말만 반복하였지요.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야 1908년 일제 통감부가 이완용 등 친일파 대신들의 도움을 받아 가짜 서류를 만들어 덕화은행에서 고종의 내탕금을 인출해 간 것으로 드러났답니다. 역사학자들은 고종이 내탕금으로 독립 운동을 펼치려 하자 이를 눈치챈 이토 히로부미와 일제 통감부가 몰래 내탕금을 빼돌린 것으로 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