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노예제 없애고 근대화 이끌었던 마지막 황제
[브라질 제국 페드루 2세]
아버지 페드루 1세가 왕위 떠넘겨 섭정 거친 뒤 16세부터 통치 시작
정치 안정과 근대화로 번영 이끌어
'황금법'으로 노예제 폐지했지만 반대파 쿠데타로 유럽으로 망명
오늘날 훌륭한 황제로 평가받아요
삼바와 축구의 나라 브라질이 최근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 빠졌어요. 미셰우 테메르 브라질 대통령이 뇌물을 받은 정황이 드러나면서 테메르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거든요.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이 뇌물을 받은 문제로 탄핵이 된 지 9개월여 만에 브라질은 또다시 대통령이 탄핵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받은 브라질은 1822년 독립한 후로도 끊임없는 정치적 혼란을 겪었어요. 하지만 브라질 제국 두 번째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였던 페드루 2세(1825~1891) 시기에는 정치적 안정과 근대화를 통한 번영을 누렸지요. 오늘날에도 페드루 2세는 브라질 역사에 가장 자랑스러운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답니다.
◇브라질 독립과 브라질 제국의 수립
약 300년간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지배하면서 브라질은 사탕수수를 대량으로 경작하는 플랜테이션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지주들이 광대한 땅에 노예를 부려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설탕을 만들어 돈을 벌었어요. 플랜테이션을 위해 아프리카에 살던 수많은 흑인이 노예로 브라질에 끌려오기도 했습니다.
플랜테이션으로 포르투갈에 막대한 부를 안기던 식민지 브라질은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을 정복하면서 포르투갈 왕실이 브라질로 도피했기 때문이죠. 13년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가 포르투갈의 임시 수도가 되기도 했고요.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포르투갈 왕실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정치·경제적으로 성장한 브라질을 더 이상 식민지로 취급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에 브라질을 왕국으로 격상시키고 포르투갈과 연합 왕국을 수립한다고 선언했답니다. 브라질 왕국에는 폭넓은 자치권을 허용하기로 하였지요.
하지만 포르투갈 의회가 이런 결정에 반대하고 나섰어요. 나아가 연합 왕국 해체와 브라질을 다시 식민지로 격하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지요. 이에 분노한 브라질 국민들은 독립운동에 나섰고, 1822년 브라질에 머물고 있던 포르투갈 주앙 6세의 아들 동 페드루가 브라질의 독립과 브라질 제국의 수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브라질 제국의 초대 황제 페드루 1세로 즉위하였어요.
◇근대화와 정치 안정을 이끌다
즉위 초에는 하늘을 찌를 듯하던 페드루 1세의 인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페드루 1세는 입헌군주제를 선언했지만 독재적인 통치를 펼쳤고, 브라질 내 극심한 정치적 갈등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어요. 급기야 브라질 남부 지역이 우루과이로 독립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낙심한 페드루 1세는 고작 다섯 살이던 아들 페드루 2세에게 황제 자리를 떠넘기고 포르투갈로 떠나버렸어요.
열여섯 살 전까지 섭정(攝政·군주가 직접 통치할 수 없을 때 군주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통치하는 동안 페드루 2세는 외롭고 불우한 환경에서 황제가 될 수업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도 페드루는 황제로서 나라를 발전시키겠다는 강한 의무감과 국가에 헌신할 책임감을 갖춘 황제로 자라났어요. 그리고 1841년부터 직접 통치를 시작하면서 그의 뛰어난 능력과 성품이 빛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 ▲ 19세기 브라질 제국을 다스린 페드루 2세는 정치 안정과 근대화 정책, 노예제 폐지 등 여러 뛰어난 업적을 남겼어요. /위키피디아
당시 브라질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네덜란드를 비롯한 여러 유럽 열강이 식민지를 개척하고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벌이면서 브라질 플랜테이션의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이었죠. 이에 페드루 2세는 사탕수수와 설탕 대신 커피 생산을 장려해 브라질 경제를 회복시켜 나갔습니다. 오늘날 브라질 커피가 유명한 것도 이때부터 커피 생산을 늘린 덕분이지요.
학문과 과학, 예술 분야에도 깊은 관심과 재능을 가졌던 페드루 2세는 유럽에 유학생을 보내 선진 문물을 배우게 하고 학교를 세워 브라질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였어요. 브라질에 철도, 전신 시설이 놓이고 증기선 운항이 늘어난 것도 페드루 2세 덕분이었지요. 페드루 2세는 1840년 직접 카메라를 들여와 브라질 최초의 사진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페드루 2세는 뛰어난 정치력으로 브라질 정치 상황도 안정시켰어요. 독재적으로 정치를 하지 않고 보수파와 자유파의 의견을 모두 존중했습니다. 두 파를 교대로 내각에 등용해 정치적 화합을 위해 노력했지요. 언론·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데에도 힘썼고요. 그 결과 페드루 2세는 브라질 국민으로부터 높은 인기와 존경,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노예제 폐지가 부른 제국의 붕괴
하지만 오랜 세월 페드루 2세의 통치가 이어지자 브라질 사람들은 그의 뛰어난 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고, 그만큼 그의 인기도 서서히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1889년, 페드루 2세는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유럽으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페드루 2세가 노예제를 폐지한 것이 그 발단이 되었어요.
브라질은 페드루 2세 통치 시절에도 노예제가 만연하였어요. 플랜테이션으로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쥐고 있던 지주들에게 노예는 없어선 안 될 존재였기 때문이죠. 반면 인권을 중시하고 근대화를 추진했던 페드루 2세는 집권 초부터 노예제 폐지를 위해 노력했답니다. 그 결과 1850년대에는 대서양 노예무역 금지법이 마련됐고 1871년에는 여자 노예가 낳은 아이를 노예가 아닌 자유 시민으로 인정하는 법도 제정되었지요. 하지만 지주들의 강한 반대에 막혀 노예제 폐지까지 나아가지 못했고, 그 결과 브라질은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노예제가 있는 나라가 되었어요.
- ▲ 1888년 5월 노예제 폐지 법안이 통과되자 환호하는 브라질 군중의 모습. /위키피디아
프랑스로 망명한 페드루 2세는 1891년 병으로 급작스럽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유해는 약 30여 년이 지난 1920년에야 브라질로 돌아올 수 있었지요. 공화국이 수립되고 오히려 브라질이 정치·경제적 위기에 처하면서 페드루 2세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는 여론이 높아졌기 때문이었지요. 페드루 2세의 유해는 그의 이름을 딴 도시 페트로폴리스에 안장되었고, 오늘날까지 그는 브라질의 발전과 번영을 이끌었던 황제로 기억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