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클래식 따라잡기] 서정적 멜로디 사랑한 두 거장의 우정

입력 : 2017.05.27 03:07

[라흐마니노프와 크라이슬러]

낙천적이고 유쾌한 크라이슬러, 내성적이었던 라흐마니노프… 만나자마자 서로의 음악에 반해
20세기 초 작곡가·연주자로 활동… 낭만적·서정적인 음악 사랑했어요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가 오는 3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내한 공연을 가질 예정입니다. 크레머가 최근 출시한 앨범의 첫 번째 트랙 '기도'를 들어보면 귀에 익은 곡이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어요. 음악가 라흐마니노프(Rakhmaninov ·1873~1943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중 2악장의 멜로디를 그의 친구이자 음악가인 프리츠 크라이슬러(Kreisler·1875~1962년)가 바이올린과 피아노 연주용으로 편곡한 작품이거든요. 곡을 감상하면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이 그동안 왜 많이 연주되지 않은 걸까'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라흐마니노프와 크라이슬러는 20세기 초·중반을 주름잡았던 음악가인 동시에 남다른 우정을 나누었던 사이예요. 두 사람 모두 작곡가이면서 뛰어난 연주자였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를, 크라이슬러는 바이올린을 연주해 관객들을 감동하게 했지요. 복잡하고 전위적인 스타일이 많이 나타났던 20세기 초반 클래식 음악의 흐름과 다르게 두 사람 모두 아름답고 서정적인 멜로디를 사랑한 로맨티시스트였습니다.

◇음악 신동이자 뛰어난 연주자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노브고로드라는 곳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때부터 타고난 음악적 재능과 뛰어난 기억력으로 천재성을 보인 그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구사하는 피아니스트로 성장했어요. 모스크바 음악원을 졸업하기 전부터 오페라를 쓰며 작곡가로서도 두각을 보였지요.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와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크라이슬러는 20세기 초·중반을 주름잡은 뛰어난 음악가이자 절친한 친구 사이였습니다.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와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크라이슬러는 20세기 초·중반을 주름잡은 뛰어난 음악가이자 절친한 친구 사이였습니다. /위키피디아·Flickr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에는 작곡가보다 피아니스트로 더 유명해졌어요. 자신이 쓴 작품뿐 아니라 베토벤, 쇼팽, 슈만 등 클래식 거장들의 작품을 탁월하게 해석하는 연주자로 전 세계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클래식 팬은 뛰어난 기교로 짙은 낭만성을 내뿜는 그의 연주 음반을 즐겨 듣지요.

크라이슬러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역시 어릴 때부터 음악 신동으로 아주 유명했어요. 불과 열두 살의 나이로 빈 시립음악원과 파리 국립음악원을 모두 졸업했습니다. 1899년 베를린 필과의 협연으로 데뷔 무대를 치른 뒤에는 잠시 의학 공부를 하기도 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인으로 전쟁에 참가하기도 했어요.

이후 크라이슬러는 부드러우면서도 풍부한 표현력을 자랑하는 특유의 바이올린 주법으로 유명세를 탔고, 전 세계를 돌며 공연을 가졌습니다. 작곡가로서도 뛰어난 역량을 지녔던 크라이슬러는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품(작은 작품)을 많이 썼어요. '사랑의 슬픔' '사람의 기쁨' '빈 카프라치오' '중국의 북' 등이 특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크라이슬러는 자신이 작곡한 바이올린 소품들을 두고 오랫동안 "내가 아니라 과거 다른 작곡가가 쓴 작품"이라고 얘기하고 다녔습니다. 나이가 많이 든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작곡한 작품이라고 고백하였지요. "대체 왜 자신의 작품인 걸 숨겼느냐"는 질문에 크라이슬러는 "젊었을 때 내가 작곡했다고 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까 봐 그랬다"고 답했답니다. 참 독특한 분이죠?

◇성격은 달랐지만 음악으로 하나가 되다

여러 면에서 비슷해 보이는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였어요. 앞선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크라이슬러는 낙천적이고 늘 유쾌했지만, 라흐마니노프는 내성적이고 조금 어두운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두 사람은 처음 만나자마자 서로의 뛰어난 실력에 반해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여러 무대에 올라 이중주를 선보였지요. 각 분야에서 최고 거장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이중주를 들은 청중은 예외 없이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습니다. 지금도 두 사람의 무대를 녹음한 음반이 회자되고 있는데, 특히 1928년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녹음은 '역대급 연주'로 유명합니다.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은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주기도 했어요. 어느 날 크라이슬러와 라흐마니노프는 뉴욕 카네기홀에서 함께 연주를 하였어요. 그런데 연주 도중 크라이슬러가 그만 악보 일부를 살짝 잊어버렸지요. 당황한 크라이슬러가 라흐마니노프에게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지(우리가 어디를 연주하고 있지)?"라고 묻자 라흐마니노프는 덤덤한 표정으로 "카네기홀!"이라고 엉뚱한 답을 했던 일이 있었지요.

두 사람의 우정은 작곡에서도 이어졌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독주를 위해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편곡하기도 했는데, 크라이슬러가 작곡한 '사랑의 슬픔' '사랑의 기쁨'도 편곡하였어요. 라흐마니노프가 편곡한 두 작품은 원곡의 왈츠 리듬과 아름다운 멜로디에 피아노의 화려한 기교가 더해져 또 다른 명곡이 되었답니다.

두 사람의 작품은 생전에 유행이 지났다고 여겨졌던 낭만주의 전통을 중시했고, 19세기 클래식 음악을 떠올리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오늘 하루 두 사람의 작품과 연주를 감상하며 그들의 진한 우정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김주영 피아니스트 기획·구성=배준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