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경제 이야기] 금 보관증은 지폐, 보관업은 은행업으로 발전했어요

입력 : 2017.05.26 03:11

[태환지폐]

17세기 영국서 발행된 금보관증
시장에서 돈처럼 유통되기 시작, 금으로 바꿔주는 태환지폐로 발전
금·은 가치따라 지폐 가치도 변해 경제 혼란 일어나는 한계 드러나
신용으로 발행하는 불태환지폐 등장

서양에서 근대적인 지폐가 등장한 시기는 대략 17세기 무렵입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상인들이 금 세공업자에게 금을 맡기고 보관 증서를 받는 현상이 나타났어요. 상인 A가 금 세공업자 B에게 금 3돈을 맡기면, B는 'A가 나에게 금 3돈을 맡겼으니 이 보관 증서를 나에게 주면 A가 맡긴 금 3돈을 내어주겠다'는 문서를 써서 A에게 주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면 A는 금을 보관해주는 대가로 B에게 보관료를 주었지요.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상인들이 돈을 벌어 영국 정부에 금으로 맡겨두었더니 왕이 마음대로 보관된 금을 꺼내어 쓰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렇게 금 세공업자가 써준 보관 증서를 영국 사람들은 '골드스미스 노트(Goldsmith's note)'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골드스미스 노트가 발행되기 시작하자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어요. 골드스미스 노트가 마치 돈처럼 사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인 A가 상인 C가 운영하는 정육점에서 금 3돈 분량의 고기를 산 뒤 B에게 받은 골드스미스 노트를 내미는 것이죠. "이 보관 증서를 B에게 가져가면 금 3돈을 내어 줄걸세"라고 말하면서요. 상인들은 무거운 금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골드스미스 노트만으로 물건을 사고팔 수 있게 되자 이런 방식이 편리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렇게 골드스미스 노트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자 금 세공업자 중에서는 아예 금·은을 보관하고 골드스미스 노트를 써주는 걸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답니다. 이런 과정에서 골드스미스 노트는 지폐로, 금 세공업자는 은행업자로 발전한 것이죠.

이때 발행된 지폐는 물건을 사고팔 때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지폐를 발행한 은행에 찾아가면 언제든 지폐에 적힌 액수만큼의 금·은으로 교환할 수 있었어요. 이렇게 정부나 은행이 '지폐의 가치에 해당하는 금·은으로 언제든 교환해주겠다'고 약속한 지폐를 태환지폐(兌換紙幣·convertible paper money)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지폐를 단순한 종이쪽지로 여기지 않고 귀한 돈으로 여기게 된 건 지폐를 언제든 금·은으로 교환해주겠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태환지폐의 한계와 불태환지폐의 등장

그런데 태환지폐가 널리 유통되고 발행량도 늘어나자 여러 문제가 나타났어요. 태환지폐는 '반드시 금이나 은으로 교환해주겠다'고 약속한 지폐이기 때문에, 지폐를 발행하는 은행·정부는 각자 가지고 있는 금·은의 양만큼만 지폐를 발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경제 규모가 커지고 사람들이 더 많은 지폐가 필요해도 정부나 은행이 그만큼의 금·은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지폐 발행을 늘릴 수가 없었어요.

1882년부터 1933년까지 미국에서 유통된 태환지폐예요. 당시 미국에서 이 지폐를 은행에 가져가면 언제든 금화로 바꿀 수 있었지요.
1882년부터 1933년까지 미국에서 유통된 태환지폐예요. 당시 미국에서 이 지폐를 은행에 가져가면 언제든 금화로 바꿀 수 있었지요. /위키피디아

더 큰 문제는 태환지폐의 가치가 금·은의 가치에 따라 심하게 변한다는 점이었습니다. 태환지폐와 금·은은 서로 교환할 수 있으니 가치도 같다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 보니 시장에서 금·은의 가격이 달라지면 태환지폐의 가치도 달라지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금·은의 가치는 썩 안정적이지 않았어요. 가령 새로운 대형 은광이 발견되면 은 유통량이 늘어나 은 가격이 폭락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만큼 태환지폐의 가치가 떨어지고, 지폐의 가치가 떨어진 만큼 물가는 치솟았지요. 반대로 은이 갑자기 귀해지면 지폐의 가치가 치솟고 물가는 뚝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금·은의 시세에 따라 지폐의 가치가 들쭉날쭉하면서 경제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현상이 계속해서 나타났어요. 태환지폐를 사용하던 대부분의 나라는 결국 이런 혼란을 견디지 못하고 1930년대에 태환지폐를 폐지했어요. 기존 지폐는 금이나 은으로 바꾸어주지 않는 '불태환지폐(不兌換紙幣)'로 변했고요. 드물게 미국은 금 태환지폐를 계속 사용했지만, 1972년 이후 달러화도 불태환지폐가 되었습니다.

◇태환지폐의 한계를 내다본 존 로

제25대 미국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매킨리는 대선 포스터에서 금 태환지폐를 국가화폐의 기초로 삼는 공약을 내세웠어요.
제25대 미국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매킨리는 대선 포스터에서 금 태환지폐를 국가화폐의 기초로 삼는 공약을 내세웠어요.

그런데 일찌감치 태환지폐와 본위 제도의 한계를 내다본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스코틀랜드 출신 재무 전문가 존 로(John Law ·1671~1729년)입니다. 로는 1705년 '화폐와 무역'이라는 책을 내고 "금·은뿐만 아니라 토지, 개인의 신용을 담보로 한 지폐를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로는 금·은은 가격이 너무 심하게 변해 금·은을 담보로 태환지폐를 발행하면 지폐 가치도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토지는 비교적 가격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토지를 담보로 태환지폐를 발행하면 지폐의 가치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죠.

이렇게 지폐의 가치가 안정되면 정부나 은행은 부담 없이 지폐 공급을 늘릴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이 필요한 만큼 지폐 공급이 늘어나면 기업의 투자가 늘어나고 무역도 활발해져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게 로의 주장이었어요. 그렇게 경제가 발전하면 토지의 가치도 높아지고, 그럼 토지를 담보로 발행된 태환지폐의 가치도 높아지게 되지요.

이런 선순환이 이루어지면 정부나 은행은 굳이 담보를 내세우지 않아도 지폐를 발행할 수 있게 된다는 게 존 로의 예측이었어요. 불태환지폐가 등장할 것이며 불태환지폐가 경제에 더 도움이 될 것임을 미리 내다본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유통되는 불태환지폐는 금·은이나 토지 등으로 교환해 주진 않지만, 정부가 "지폐의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발행하는 것이죠. 사람들은 이런 약속을 믿고 지폐를 돈으로 여기며 사용하는 거고요.

그런데 그 약속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요? 그 근거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관리통화제도예요. 정부가 지폐의 발행량을 적절히 조절해 지폐의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하기 때문에 불태환지폐의 가치가 유지될 거라고 믿을 수 있지요.

또 다른 근거는 기축통화(基軸通貨·key currency)예요. 기축통화란 나라 간 무역·금융거래를 할 때 주로 사용되는 돈으로, 세계 최고 경제 대국인 미국의 달러화가 가장 대표적이지요. 우리나라 돈 '원화'는 미국의 달러화와 특정한 비율(환율)로 교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믿을 수 있습니다. 또 미국과 우리나라 정부가 각자 지폐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때문에 불태환지폐의 가치도 안정적일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요.




천규승 미래경제교육네트워크 이사장 기획·구성=배준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