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종교·관습 포용한 다민족 제국… 2400㎞ 도로망 깔았죠

입력 : 2017.05.25 03:12

[페르시아]

양치기에서 왕이 된 키루스 2세
관용 정책 앞세워 주변 국가 정복… 기원전 6세기 중동에 대제국 건설

다리우스 1세 때 최대 영토 확보… 도로망·공공사업으로 최전성기
알렉산더 대왕 침략으로 멸망했죠

지난 19일(현지 시각) 치러진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개혁파 후보 하산 로하니(69) 대통령이 득표율 57%로 강경·보수파 단일 후보 이브라힘 라이시를 제치고 다시 한 번 대통령에 당선되었어요. 지난 2013년 대통령이 된 로하니가 4년 더 집권하게 되면서 향후 이란은 더 폭넓은 개혁·개방 정책을 펼칠 것으로 보입니다.

이란은 페르시아 민족의 나라입니다. 페르시아인들은 고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막강한 왕국을 수립했어요. 그중에서도 고대 오리엔트 세계를 제패했던 페르시아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답니다.

◇양치기 소년이 대제국을 건설하다

페르시아 제국의 기원은 기원전 8세기 무렵 페르시아인들이 중동 지역에 세운 아케메네스 왕국(얀잔 왕국)이에요. 주변 강대국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아케메네스 왕국은 기원전 6세기 키루스 2세 (키루스 대왕·BC 585?~BC 529년)가 왕이 되면서 대제국으로 발전하였지요.

페르시아 제국의 왕 다리우스 1세가 여름 궁전을 짓고 살았던 페르세폴리스 유적지의 모습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왕 다리우스 1세가 여름 궁전을 짓고 살았던 페르세폴리스 유적지의 모습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페르세폴리스 유적지의 규모는 축구장 25개를 합친 것과 비슷해요. /Flickr
키루스 2세의 어머니는 오늘날 이란 북서부에 있던 메디아 왕국의 공주 만다네였어요. 만다네의 아버지인 메디아 왕국 국왕은 어느 날 만다네가 낳은 아들이 메디아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암시하는 꿈을 꾸었어요. 겁이 난 메디아 국왕은 딸 만다네를 변방의 작은 나라였던 아케메네스 왕국의 왕 캄비세스 1세와 혼인시켰지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만다네가 키루스 2세를 낳자마자 부하를 불러 키루스 2세를 납치해 죽이라고 지시했습니다.

부하는 키루스 2세를 납치하는 데 성공했지만, 차마 자기 손으로 갓난아기를 죽일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산에 살던 양치기에게 아기를 건네고 돈을 주며 아기를 죽여달라고 부탁했답니다. 하지만 양치기는 아기를 죽였다고 거짓말을 하고 키루스 2세를 친아들처럼 키웠어요. 그렇게 아케메네스 왕국의 왕자는 양치기 소년이 되었지요.

건장하고 영리한 청년으로 자란 키루스 2세는 자신이 원래 왕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원전 559년 아버지 캄비세스 1세를 이어 아케메네스 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9년 뒤 메디아 왕국을 멸망시켰지요. 이후 키루스 2세는 인근에 있는 리디아 왕국, 신바빌로니아 왕국 등을 정복해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했어요.

키루스 2세가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여러 지역의 고유한 종교와 관습을 인정해주는 관용 정책을 폈기 때문이었지요. 페르시아의 라이벌이었던 신바빌로니아는 비옥한 땅에서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사는 강대국이었어요. 하지만 국왕과 후계자가 종교 탄압을 일삼고 빈부 격차가 커지면서 백성의 원성이 컸지요. 반면 키루스 2세는 여러 종교와 관습을 존중하고 군인들이 점령지 주민을 약탈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신바빌로니아 백성들이 직접 성문을 열어 키루스 2세를 맞이하였고, 덕분에 키루스 2세는 손쉽게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할 수 있었어요. 키루스 2세의 관용 정책은 훗날에도 이어져 페르시아가 다민족 제국으로 번영하는 기틀이 되었답니다. 키루스 2세는 오늘날에도 이란 국민 사이에서 '이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불리고 있어요.

◇제국의 전성기를 연 다리우스 1세

페르시아제국
페르시아 제국은 다리우스 1세(BC 550~BC 486년)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어요. 키루스 2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죽고 페르시아 왕실이 혼란에 빠지자 귀족이었던 다리우스 1세는 왕실의 혼란을 잠재우고 페르시아 제국의 왕이 되었지요. 뛰어난 책략가였던 다리우스 1세는 제국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정복 전쟁을 일으켜 동쪽으로는 인도 서북부 인더스강 유역, 서쪽으로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인 다르다넬스 해협까지 모두 페르시아 제국의 땅으로 만들었지요.

두 번에 걸친 그리스 정벌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지만, 페르시아 제국이 전성기를 누리는 데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어요. 다리우스 1세가 정교한 통치 체제를 갖추고 여러 공공사업을 일으켜 제국의 번영을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다리우스 1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광대한 도로망을 갖춘 것입니다. 다리우스 1세는 수도 파사르가다 남쪽에 페르세폴리스라는 도시를 건설해 수도를 옮기고, 그보다 서쪽에 있는 수사를 제2의 수도로 삼았어요. 그리고 페르세폴리스와 수사, 그리고 제국 서쪽의 경제 도시 사르디스를 잇는 도로를 지었습니다. '왕의 길'이라 불린 이 도로의 총길이는 약 2400㎞에 이르렀지요. 페르시아 제국은 '왕의 길'을 통해 지방에 걷은 세금을 중앙 정부로 신속히 옮기고 반란이 일어난 지방이나 국경 지대에 더 빨리 군대를 보낼 수 있게 되었어요.

다리우스 1세는 역참 제도를 갖추어 '왕의 길'을 통치 수단으로도 활용했어요. 도로를 따라 여관과 말을 갈아탈 수 있는 역을 100여 개나 설치하고 우편물도 역참을 통해 전달하게 하였지요. 왕의 지시를 지닌 전령들은 역참을 통해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지방 곳곳에 다리우스 1세의 명령을 전했습니다. 지방 총독을 감시하는 비밀경찰도 '왕의 길'과 역참을 통해 지방 곳곳을 옮겨다니며 총독들의 움직임을 살피고 다리우스 1세에게 신속히 보고하였지요.

이렇게 페르시아 제국은 종교·문화에 대한 관용과 정치·경제적 안정이 어우러지면서 번영을 누렸어요. 다리우스 1세는 페르세폴리스에 여름 궁전, 수사에 겨울 궁전을 짓고 새해가 되면 연회를 열었어요. 이 연회에는 귀족과 관료, 주변 나라에서 몰려든 무역 상인과 외교 사절 등 1만 5000여 명이 모여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수만 마리의 동물을 잡아 고기를 먹고 술을 마셨다고 해요. 페르시아 제국이 얼마나 번성했는지 짐작이 되지요?

하지만 다리우스 1세가 죽고 왕실에 잦은 내분이 벌어지면서 국력이 서서히 약해졌고, 기원전 4세기 말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란의 옛 이름은 '페르시아']

1935년 나라 이름을 바꾸기 전까지 이란의 국명은 '페르시아(Persia)'였어요. 고대 그리스인들은 오늘날 이란 남서부 해안 지역에 사는 민족을 '파르스(Fars)'라고 불렀어요. 이'파르스'가 라틴어로 바뀌면서 '페르시아'로 변한 것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은 기원전 4세기에 멸망하였지만, 기원전 3세기 중반 파르티아 제국이 수립되면서 페르시아 제국의 명맥이 이어졌어요. 이후 사산왕조 페르시아·사파비 왕조·팔레비 왕조 등을 거쳐 오늘날 이란에 이르게 되었지요.
김승호 인천하늘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배준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