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모두가 마다한 황제, 제후들이 선거로 뽑았어요

입력 : 2017.05.11 03:08

[대공위(大空位)시대]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2세, 교황에게 파문당하고 병으로 사망… 이후 20년 가까이 황제 자리 비어
"새 황제 빨리 뽑아라" 교황 통보에 선거권 가진 제후들이 회의 열어 합스부르크 가문 루돌프 1세 선출

오늘 제19대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약 두 달간 비어 있던 대통령 자리가 다시 메워지게 되었습니다. 5월에 열려 '장미 대선'이라 불렸던 이번 선거에는 10명이 넘는 후보가 출마해 "내가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며 열띤 선거전을 펼쳤어요. 그리고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투표를 통해 새로운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13세기 유럽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제후들이 서로 왕관을 마다하는 바람에 황제 자리가 20년 가까이 비어 있던 때가 있었어요. 이 시기를 대공위시대(Great Interregnum·1254~1273년)라고 합니다. 선거마다 후보들은 서로 당선이 되려고 하는데, 대공위시대에는 왜 아무도 황제가 되지 않으려 했던 걸까요?

◇신성로마제국의 기원

고대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무너진 뒤 서유럽은 오랫동안 분열의 시대를 보냈습니다. 7~8세기에는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서유럽 세계를 공격했고요. 이런 위기 상황에서 프랑크 왕국의 유능한 신하였던 카롤루스 마르텔이 이슬람의 침공을 막아냈어요. 서유럽 세계의 영웅이 된 카롤루스 마르텔은 프랑크 왕국의 실권을 차지하게 되었지요. 나아가 카롤루스 마르텔의 권력을 이어받은 아들 피핀은 강제로 왕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가졌던 7명의 선제후(選帝侯)들이 회의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가졌던 7명의 선제후(選帝侯)들이 회의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에요. /위키피디아
피핀에 이어 왕이 된 카롤루스 대제(742~814년)의 활약으로 프랑크 왕국은 서유럽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였어요. 그러자 교황은 카롤루스 대제를 '서로마제국의 후계자'이자 '로마제국의 황제'로 지목하였습니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가 죽고 난 뒤 프랑크 왕국은 카롤루스 대제의 손자들에 의해 동프랑크, 중프랑크, 서프랑크 왕국으로 분열되었고, 노르만족의 침입을 받으면서 '로마의 황제'를 계승할 사람도 사라졌어요.

10세기 무렵, 서유럽을 둘러싼 여러 민족이 재차 서유럽을 공격했어요. 이때 동프랑크 왕국(독일 왕국)을 지배하던 오토 1세(912~973년)가 마자르족의 침입을 막아냈고, 교황은 오토 1세를 '로마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였어요. 962년 오토 1세가 황제로 즉위하자 사람들은 "마침내 고대 로마제국이 부활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이었어요. 이후 독일 왕국의 국왕은 자연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선거를 통해 정해졌어요. 물론 이 선거는 오늘날과 다르게 아주 형식적이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황제가 자신의 아들이나 혈족 중에 후계자를 지목하면, 제후들이 선거를 통해 후계자를 새로운 황제로 인정하는 절차였지요. 이는 성인 남성이 모여 다수결을 통해 부족의 지도자를 뽑았던 고대 게르만족의 전통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황제의 권력이 무너진 대공위시대

신성로마제국 초기에는 황제와 교황이 친하게 지냈어요. 황제는 자신의 권위를 뒷받침해주는 교황이 필요했고, 교황은 자신의 권위를 권력과 군사력으로 지켜줄 황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서유럽 세계가 점차 안정되면서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이 독일에서 이탈리아까지 영토를 넓히길 원했기 때문이었어요.

특히 프리드리히 2세(1194~1250년)가 교황이 지배하던 로마를 노리자 황제와 교황의 갈등은 아주 심각해졌습니다. 급기야 화가 난 교황이 프리드리히 황제를 교회에서 파문(破門·신도로서의 자격을 빼앗고 내쫓음)해버렸어요. 중세 서유럽 세계는 기독교가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가 파문된 것은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각 지역을 다스리던 제후들이 파문당한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어요.

각지에서 반란이 이어지자 신성로마제국의 힘은 급격히 약해졌습니다. 힘도 명예도 잃은 황제의 권위도 바닥에 떨어졌고요. 거듭된 반란을 진압하다 지친 프리드리히 2세는 장염에 걸려 죽었고, 그의 아들 콘라드 4세도 황제로 인정받지 못한 채 4년 뒤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후 신성로마제국은 '황제가 없는 나라'가 되어버렸어요. 일각에서 "새로운 황제를 뽑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제후들은 각기 다른 사람을 추천하며 황제 자리를 마다했습니다. 굳이 힘도 권위도 없는 황제가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이것이 바로 대공위시대였어요.

◇'황제 선거'로 새로운 명문가가 탄생하다

하지만 황제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자 신성로마제국은 점점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지방 도시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고 도둑과 강도가 늘어나 교회를 약탈하거나 교황의 영지를 침범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그러자 황제와 갈등을 빚었던 교황도 '새로운 황제를 뽑아 혼란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에 교황은 제후들에게 "이번엔 반드시 새로운 황제를 선출해달라. 만약 이번에도 황제를 선출하지 못하면 내 마음대로 황제를 지목하겠다"고 통보했습니다

교황의 통보에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뽑을 권한을 가진 7명의 제후가 선거회의를 열었어요. 그리고 1273년, 스위스 산악지역의 작은 영지를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루돌프 1세(1218~1291년)가 새로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습니다. 이전에 열렸던 형식적인 선거와 달리 루돌프 1세는 실질적인 선거를 거쳐 황제가 된 것이죠.

이렇게 대공위시대는 '황제 선거'를 통해 막을 내렸어요. 그리고 이 선거는 이후 유럽 전체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루돌프 1세는 뛰어난 정치력으로 황제의 권한을 다시 강화하였고, 덕분에 향후 600여년간 합스부르크 가문은 황족 가문으로 유럽 여러 나라에 왕을 배출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황제 선거'가 작은 귀족 가문을 중세 유럽을 지배한 명문가로 만든 셈이에요.


김승호 인천하늘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배준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