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중국 4대 미녀' 왕소군이 흉노에 시집간 사연은…

입력 : 2017.05.04 03:07

[조공·책봉 관계]

고대 중국 통일했던 한나라
북방 유목민족 흉노 침입 막으려 음식·옷감 바치고 왕실 여인 보내

군사적·경제적 이득 보기 위해 약소국이 먼저 조공 제의하기도
서열 정해 이득 나눈 관계였죠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난 뒤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Korea actually used to be a part of China)"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느냐"는 물음에 트럼프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에게 들었다"고 답했지요. 백악관에서 "우리는 한국이 수천년간 독립적인 국가였던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해명했지만, 많은 분이 황당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기도 했어요.

이번 해프닝을 두고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조공(朝貢)-책봉(冊封) 관계를 잘 알지 못해 그런 발언을 한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어요. 과거 동아시아만의 독특한 외교 방식인 조공-책봉 관계를 단순히 '지배하는 나라와 지배받는 나라의 관계'로 생각해 그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그럼 조공-책봉 관계가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스스로를 '아황제'라 부르다

조공-책봉 관계는 지금부터 약 3000년 전에 등장했어요. 기원전 11세기 무렵 중국에서는 상(商)나라가 무너지고 주(周)나라가 들어섰습니다. 이때 주나라 임금(천자·天子)은 상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공을 세운 신하와 친족들에게 영토를 조금씩 나누어주고, 그 영토를 다스릴 권리와 작위도 주었어요. 이렇게 영토와 작위를 받은 사람들을 '제후(諸侯)'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정기적으로 천자를 찾아가 옷감이나 귀한 음식 등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고대 중국 한나라의 미인‘왕소군’이 유목 민족 흉노의 왕과 혼인을 맺으러 가는 모습을 상상해 그린 그림이에요.
고대 중국 한나라의 미인‘왕소군’이 유목 민족 흉노의 왕과 혼인을 맺으러 가는 모습을 상상해 그린 그림이에요. 한나라는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한동안 옷감과 음식을 바치고 왕실의 여인을 흉노족의 왕과 혼인하도록 했습니다. /중국 국립 도서관
이런 조공-책봉 관계는 중국에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등장하면서 주변 국가와의 외교에도 적용되기 시작했어요. 조선도 명나라나 청나라를 주인 나라로 섬기며 조공을 바쳤고, 새로운 임금이 즉위하면 명·청 황제로부터 인정(책봉)을 받아야 비로소 정식 국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뿐 아니라 중국 주변에 있었던 여러 나라가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치는 주인-신하 관계를 맺었지요.

이렇게 보면 조공-책봉 관계가 마치 '중국이 주변 국가들을 지배하던 방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거꾸로 중국 황제가 다른 나라 황제를 섬기고 책봉을 받은 일도 있었답니다. 10세기 무렵 '후당'이라는 나라에 석경당(石敬)이라는 신하가 있었어요. 야심이 컸던 석경당은 후당의 황제를 몰아내고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유목민족의 나라 거란(契丹)에 도움을 청했어요.

석경당은 거란의 황제 아율덕광(태종)에게 "거란이 군사를 보내 후당을 무너뜨리면 영토 일부를 바치고 거란의 신하가 되겠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거란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겠다고 제의한 것이죠.

아율덕광은 이를 수락하고 군대를 보내어 후당을 멸망시켰습니다. 거란군과 함께 후당을 무너뜨린 석경당은 후진(後晉)을 세우고 황제가 되었어요. 그리고 약속대로 거란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아율덕광은 책봉식을 열고 석경당을 후진의 황제로 인정하였어요. 석경당은 아율덕광과 부자관계를 맺고 아율덕광을 '부황제(父皇帝·아버지 황제)', 자신을 '아황제(兒皇帝·아들 황제)'라고 불렀답니다. 또 후진의 땅 일부를 거란에 넘기고 비단 30만필을 조공으로 바치기도 하였어요. 이렇게 동아시아에 있던 여러 나라는 국력 차이, 전쟁의 결과 등에 따라 책봉을 하기도 하고 조공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한나라 미인 왕소군이 흉노에 시집간 사연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중국을 통일한 한(漢)나라가 유목민족 흉노(匈奴)에게 사실상 조공을 바치는 일도 있었어요. 한나라 초대 황제 유방(한 고조)이 진(秦)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통일했을 무렵, 북방 유목민족 흉노(匈奴)는 묵특선우(선우는 흉노의 왕을 가리키는 호칭)의 지휘 아래 거대한 유목 제국을 이루고 있었어요. 흉노가 한나라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 생각한 유방은 30만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결과는 예상과 달랐어요. 묵특선우의 전략에 휘말린 유방은 평성이라는 조그마한 곳에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식량이 떨어져 목숨마저 위태로운 지경이 되자 유방은 묵특선우의 아내에게 선물을 보내어 포위를 풀어달라고 사정하였지요. 아내의 설득에 묵특선우는 포위망 한쪽을 슬쩍 열어주어 유방이 달아날 수 있게 봐주었습니다. 이 일은 중국 역사서에 '평성의 치(치욕)'라고 기록될 정도로 한나라에 굴욕적이었지요.

이후 한나라는 막강한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한동안 옷감과 음식을 바치고 왕실의 여인을 보내어 흉노의 선우와 혼인하도록 했습니다. 한나라는 이를 조공이라 부르진 않았지만, 사실상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죠. '중국 4대 미녀'로 꼽히는 한나라 미인 왕소군이 흉노의 호한야선우와 혼인한 것도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어요.

◇조공-책봉 관계는 독립된 두 나라의 관계

조공-책봉 관계를 보면 책봉을 하는 나라가 조공을 받아 경제적 이득을 취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더 큰 이득을 보기도 했어요. 바로 '회사(回謝)'때문이었습니다.

회사란 조공을 받은 나라가 답례로 하사품을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조공-책봉 관계에서는 조공을 받은 나라가 조공품 이상의 하사품을 내리는 게 관례였어요.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명나라가 "조공을 받는 게 오히려 손해"라며 조선에서 조공 사신을 보내지 못하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책봉을 내리는 나라는 주인 대접을 받았지만 조공을 바치는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는 못했어요. 조선 말 서구 열강들이 청나라에 "조선이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우리와 외교관계를 맺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청나라는 "사대관계라도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니 알아서 하라"고 답변하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조공-책봉 관계는 독립된 두 나라가 힘의 차이에 따라 서열을 정하고 서로 이득을 나누는 외교 관계였어요. 힘 있는 나라는 책봉을 통해 주변 정세를 안정시킬 수 있었고, 약소국은 조공을 바치는 대신 내정 간섭을 받지 않고 필요에 따라 군사적·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윤형덕 한일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배준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