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폴란드 왕국 기병대, 날개 펄럭이며 맹활약했죠

입력 : 2017.04.27 03:11

['윙드 후사르(winged hussars)']

16~17세기에 활약한 폴란드 기병… 날개 달린 갑옷으로 공포심 일으켜
자신보다 수십 배 많은 적군 꺾고 폴란드 연합 왕국의 전성기 열어

제2차 빈 포위전에서도 맹활약해 오스만의 유럽 침공 막아냈어요

중소 국가의 공군력에 맞먹는 전투력을 갖춘 미국 핵 추진 항공모함 칼빈슨(Carl Vinson)호가 며칠 내로 동해에 다다를 예정입니다. 아파트 25층 높이에 갑판 넓이가 축구장 3배인 칼빈슨 호에는 신형 함재기(항공모함에 이·착륙하는 전투기) 80여 대가 실려 있어요. 군사 전문가들은 "미국이 칼빈슨호를 한반도에 보낸 건 북한에 군사 도발을 하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은 항공모함과 핵 잠수함 등 최첨단 무기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어 세계 최강대국 지위를 누리고 있어요. '강력한 무기와 군사력을 갖추어야 강대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죠.

16~17세기 폴란드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폴란드 기병‘윙드 후사르’를 묘사한 그림이에요.
16~17세기 폴란드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폴란드 기병‘윙드 후사르’를 묘사한 그림이에요. /위키피디아
실제로 역사 속 강대국들은 늘 그에 걸맞은 신식 무기나 강한 군대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역사의 변방에 머물던 폴란드 왕국이 16~17세기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며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강력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죠.

◇폴란드 왕국의 전성기를 연 '윙드 후사르'

독일과 러시아 사이 위치한 폴란드는 약 10세기 무렵 그 역사가 시작되었어요. 하지만 스웨덴, 러시아, 오스만 튀르크 등 여러 강대국이 주변에 있어 좀처럼 세력을 펴지 못했지요. 그런데 16세기부터 세력을 키우기 시작해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연합왕국(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을 구축했고, 17세기에 들어서는 오늘날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과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대를 차지한 유럽 최강대국 중 하나로 거듭났지요.

그 배경에는 '윙드 후사르(winged hussars·날개 달린 후사르)'라는 강력한 기병대가 있었습니다. '후사르(hussar)'는 당시 동유럽에서 활약한 기병을 가리키는 말로, 헝가리 등 주변 국가에서는 대부분 가벼운 무장을 하고 소규모로 활동하며 적군을 교란하거나 보병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어요.

하지만 16세기 등장한 폴란드의 윙드 후사르는 이들과 많이 달랐어요. 튼튼한 쇠갑옷으로 중무장해 적군의 총알에도 거침없이 돌격할 수 있었지요. 이들의 갑옷 등 부위나 말 안장에 달린 화려한 깃털 장식은 윙드 후사르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깃털은 체구를 더 크게 보이도록 해 적군의 기세를 꺾고 공포심을 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여요. 윙드 후사르의 명성이 유럽 전역에 알려지면서 이 깃털 장식은 더 유명해졌습니다.

제2차 빈 포위전 당시 윙드 후사르와 오스만 군대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그림.
제2차 빈 포위전 당시 윙드 후사르와 오스만 군대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그림.
화려한 외형과 강력한 전투력을 동시에 갖춘 윙드 후사르는 자신보다 수배 많은 적군도 무참히 짓밟았어요. 단 2500명의 윙드 후사르가 단 한 번의 돌격으로 1만2000명의 스웨덴군을 무너뜨리거나 300명의 윙드 후사르가 1만5000명의 오스만 튀르크 군대로 돌격해 1000여 명을 죽이는 일도 있었지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은 윙드 후사르의 힘을 바탕으로 영토를 넓히고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오스만의 서유럽 침공을 저지하다

윙드 후사르의 위력이 가장 잘 드러난 전투는 17세기 말에 벌어진 제2차 빈 포위전이었습니다. 16세기부터 국력이 쇠퇴하던 오스만 튀르크는 1683년 신성 로마 제국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10만명이 넘는 군대를 보내 신성 로마 제국의 요충지였던 빈을 포위하였어요. 빈을 점령하고 서유럽으로 영토를 넓혀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게 오스만 튀르크의 속셈이었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 최대 영토
2만여 명의 신성 로마 제국 군대와 빈 백성은 성 안에서 오스만 군대의 공격을 잘 버텨냈지만, 두 달 가까이 포위가 계속되고 물자가 떨어지자 점점 힘이 떨어졌어요. 이를 간파한 오스만 군대의 총공세가 펼쳐졌고 결국 빈 성벽의 한쪽이 무너져내렸습니다.

빈이 함락되기 직전이던 그때, 1만8000여 명의 윙드 후사르가 모습을 드러냈어요. 신성 로마 제국의 구원 요청을 받은 폴란드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윙드 후사르와 구원군을 이끌고 빈에 도착한 것입니다.

국왕의 돌격 명령을 받은 윙드 후사르는 화려한 날개를 휘날리며 오스만 튀르크 군대로 달려들었습니다. 오스만 군대의 기병이 맞서려 했지만 윙드 후사르의 상대가 되지 못했어요. 윙드 후사르의 용맹한 돌격에 오스만 군대의 진영은 완전히 무너졌고, 심지어 군대 본진까지 점령될 처지에 놓였지요. 뒤이어 6만여 명의 폴란드 군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오스만 병사들은 허겁지겁 달아났습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 2' 후반부에 등장하는 기마 전투 장면도 바로 제2차 빈 포위전에서 윙드 후사르가 펼친 극적인 활약을 본떠 만든 것이죠.

제2차 빈 포위전 패배로 국력을 손실한 오스만 튀르크는 더 이상 유럽을 위협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몇몇 역사가는 "제2차 빈 포위전은 서유럽과 오스만 튀르크 사이의 힘의 관계가 역전된 계기"라고 말하지요. 윙드 후사르를 지휘해 제2차 빈 포위전을 승리로 이끈 얀 3세 소비에스키는 "기독교 세계를 구한 인물"로 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18세기 들어서자 폴란드 왕국은 급격히 쇠퇴하였어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피폐해지고 지도층 내분과 외교적 실수가 겹친 탓입니다. 급기야 1772년에는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나라가 분할되는 비참한 운명을 맞았지요(1차 삼국분할). 후사르도 총의 성능이 점점 좋아지면서 그 역할이 점점 줄어들었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으로 이루어진 전선(戰線)이 등장하면서 후사르와 기병은 전쟁터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김승호 인천하늘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배준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