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경제 이야기] 전 세계 덮친 대공황 치료한 '거시 경제학의 아버지'

입력 : 2017.04.21 03:09

[경제학자 케인스]

1929년 미국·유럽 대공황 빠지자 해법으로 '정부의 시장 개입' 내놔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 공공사업 등 정부 지출로 경기 회복
국가 경제 다루는 '거시 경제학'… 케인스의 이론이 발전한 결과죠

호화로운 건물,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한 베르사유 궁전은 파리로 여행가는 분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관광지입니다. 특히 벽과 천장이 거울로 이루어진 '거울의 방'이 유명하지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 '거울의 방'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1차 대전 승전국 대표와 패전국 대표들이 이 방에서 만나 전쟁을 끝맺는 베르사유 조약(1919)을 체결하였어요.

베르사유 조약에는 1차 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이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조항이 담겼어요. 당시 독일 1년 국내 총생산(GDP)을 뛰어넘는 액수였습니다. 그러자 독일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이 너무 가혹하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승전국에서도 베르사유 조약을 비판하는 전문가들이 등장했어요.

그중에는 베르사유 회의에 영국 재무성 대표로 참석했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1883∼1946)도 있었습니다. 케인스는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리고 독일 경제를 파탄 낼 것"이라며 "독일 경제의 파탄은 곧 세계 경제에도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에 베르사유 조약 수정을 요구했지만, 영국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케인스는 대표 자리에서 물러났어요.

불행히도 케인스의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배상금을 갚을 수 없었던 독일 정부는 화폐를 마구 찍어냈고, 그 결과 물가가 엄청나게 상승하고 실업자가 대규모로 발생하면서 독일 경제는 극심한 불황에 빠졌어요. 독일을 덮친 사회·경제적 대혼란에 분노한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와 나치당이 정권을 잡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1939년, 나치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지요. 1차 대전이 끝난 지 불과 20년 만에 또 다른 세계대전이 일어난 거예요.

◇자본주의의 병을 걱정하다

오늘날 '거시 경제학의 아버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로 불리는 케인스는 공산주의를 창시한 칼 마르크스가 죽은 해에 태어났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지만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였어요. 대학 졸업 후에는 영국 정부의 관리 채용 시험에 합격해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에도 꾸준히 경제학을 연구하며 관료 겸 경제학자로 활동했어요.

동시대에 살진 않았지만 마르크스와 케인스는 "자본주의는 심각한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두 사람의 생각은 현실로 나타났어요. 1929년, 경제 대공황(大恐慌)이 발생하면서 세계 경제가 역사상 유례없는 최악의 경기 침체에 빠져들었어요. 미국과 유럽의 실업률은 25%까지 치솟았습니다. "이러다 정말 자본주의가 무너지는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지요.

◇케인스의 처방과 뉴딜정책

마르크스와 케인스의 예상은 같았지만 문제에 대한 처방은 전혀 달랐어요.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심각한 병에 걸려 종말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어요. 반면 케인스는 대공황을 치유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방법은 당시 주류 경제학자들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지요.

주류 경제학자들은 "정부가 모든 경제활동에 가능한 한 간섭하지 않으면 시장의 조절 기능에 의해 경제는 자연히 잘 돌아간다"는 자유방임주의(自由放任主義)를 주장하였어요. 대공황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들의 주장은 맞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대공황이 일어나자 주류 경제학자들은 대공황의 원인이나 해결 방법을 제대로 내놓지 못했어요. 그저 "시간이 지나면 시장의 자기 조절 능력을 통해 대공황이 해결될 것"이라는 말만 반복하였지요.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왼쪽)가 기자 회견에 참석한 모습이에요. 정부의 시장 개입을 주장한 케인스의 경제학은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고 재정정책 발전과 거시 경제학 등장에 기여하였어요.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왼쪽)가 기자 회견에 참석한 모습이에요. 정부의 시장 개입을 주장한 케인스의 경제학은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고 재정정책 발전과 거시 경제학 등장에 기여하였어요. /Getty Images 이매진스
이에 대해 케인스는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라고 받아쳤습니다. 주류 경제학자들의 처방은 마치 폭풍우가 몰아쳐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어가는데도 "폭풍우가 사라지면 괜찮아진다"며 가만히 보고만 있는 무책임한 태도라는 뜻이죠.

케인스는 대공황을 극복할 처방으로 '정부의 시장 개입'을 내놓았어요. 그는 극심한 불황이 닥치면 각 가정이 소비를 늘리기 어렵고, 기업도 투자를 늘리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시장이 작동해도 소비·투자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케인스는 정부가 빚을 내서라도 정부 지출을 늘려야 기업들이 돈을 벌어 투자를 하고, 이를 통해 고용이 늘어나야 돈을 번 사람들이 소비를 늘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케인스가 남긴 유산

케인스의 이런 주장은 곧 주류 경제학자들의 비판을 받았어요. 경제학자 대부분은 케인스를 '이단아'로 취급했고, 정부의 시장 개입을 주장하는 케인스를 공산주의자로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케인스의 처방에 따라 '뉴딜정책'을 펼치자 꼼짝 않던 미국 경제가 회복되었고, 케인스를 향한 비판은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경제학계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을 연구하는 '케인스 경제학'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지요. 이런 흐름은 1970년대 전까지 유지되었지만, 그 이후로는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가 동시에 나타나는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어요.

그럼에도 케인스의 이론은 국가 경제 전반을 다루는 거시 경제학으로 발전하였고, 오늘날 정부가 지출이나 세금을 통해 경기·물가를 조절하는 재정정책을 발전시키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20세기에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로 불릴 만하지요?



한진수 경인교대 교수(사회교육과) 기획·구성=배준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