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진나라 통일 후… 선비들은 왜 대나무 숲에 들어갔을까
입력 : 2017.04.06 03:13
['삼국지' 이후 중국]
사마씨 가문이 권력 독점하자 귀족들 사이에 사치·향락 유행
지식인은 정치 현실에 등 돌려
유목 민족 침략받아 동진 세웠지만 귀족층은 정치 하찮게 여기고 외면
300여 년간 혼란 계속됐어요
수업 시간 학생들에게 삼국지를 아느냐고 물으면 삼국지를 읽지 않은 친구도 유비·조조·손권 같은 이름을 댑니다. "그럼 삼국을 통일한 나라가 어딘지 아느냐"고 물으면 한동안 교실이 잠잠하다가 자신 없는 답들이 나옵니다. "위나라…아닌가요?" 땡! 조조가 세운 위나라는 제갈량의 공격을 여러 차례 막아내고 촉나라를 멸망시킬 정도로 강성했지만, 삼국 통일을 완성한 나라는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세운 진(晋)이었어요. 사마염은 위나라 황제 조환으로부터 황제 자리를 빼앗아 진나라를 세운 뒤 280년 오나라를 무너뜨리고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진의 천하는 오래가지 못했어요. 오히려 통일 전보다 더 큰 혼란이 중국을 덮쳤답니다. 오늘은 뉴스에도 자주 언급되는 '삼국지'의 결말 이후 중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함께 알아보도록 합시다.
◇건국부터 망조가 든 진나라
진나라가 일찌감치 무너진 건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위나라 말기부터 조정의 권력은 사마의부터 사마염에 이르는 사마씨 가문이 독점하고 있었어요. 이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귀족 계층과 지식인들은 점차 정치를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사치·향락에 빠지거나 현실을 등지는 염세주의에 빠져들었지요. 이 중 가장 유명했던 일곱 사람을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자연을 벗 삼는 노장사상을 따르며 권력자를 조롱하고 기이한 행동을 하고 다녔습니다.
- ▲ 3세기 무렵 중국에서 활동했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모습을 상상해 그린 그림입니다. 위나라 말기부터 중국에 부정부패가 퍼지자 지식인들은 정치 현실에 등을 돌리고 숲에 모여 거문고를 연주하고 술을 마시며 세월을 보냈어요. 이 중 가장 유명했던 일곱 명의 선비를 후대 사람들이 ‘죽림칠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위키피디아
보다 못한 사마씨 일족이 군사를 일으켜 가씨 일족을 몰아냈지만, 이후에는 사마씨 일족 실력자 8명이 권세를 다투는 '팔왕의 난(300~306년)'이 일어나면서 더 큰 혼란이 벌어졌어요. 진나라의 상황은 유비가 관우·장비와 도원결의를 맺었던 한나라 말기만큼 혼탁하고 피폐해졌습니다. 농민들이 죄다 사마씨 일족의 군대로 끌려가면서 중국 곳곳에는 기근이 퍼졌어요.
사마씨 일족이 중국 외곽에 살던 유목 민족들을 군대로 끌어들이면서 상황은 더 심각해졌어요. 진나라의 실상을 알게 된 흉노족과 선비족 등 다섯 유목 민족이 화북 지역을 대거 침략하는 '영가의 난(307~312년)'이 일어난 것입니다. 허술한 진나라는 유목 민족의 침략을 이겨내지 못하고 316년에 멸망하였어요. 사마염이 천하 통일을 이룬 지 불과 36년 만이었습니다.
그나마 황족 사마예가 이듬해 강남지역에 동진(東晉)을 세워 진의 명맥을 이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지요. 진나라 대신 중국 북부 지역을 차지한 다섯 유목 민족은 제각각 나라를 세워 각축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300여 년간 45개 왕조 235명의 군주가 난립했던 5호16국,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어요.
◇귀족 사이에서 퍼진 정치 혐오
동진에서도 귀족층의 사치·향락과 지식인의 염세주의는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동진의 폐쇄적인 관리 등용 제도가 이를 부추겼지요. 동진은 관직을 9개 등급으로 나누어 능력에 따라 인재에게 관직을 내리는 구품관인법을 두었는데, 실제로는 능력이 아닌 가문에 따라 관직이 주어지는 제도로 변질하였어요. 이에 아무리 학식과 능력이 뛰어나도 가문이 변변치 않으면 관리가 될 수 없거나 하급 관리밖에 될 수 없었습니다. 엉터리 구품관인법은 419년 동진이 멸망하기 전까지 유지되었어요.
나아가 귀족들은 "강남지역은 우리가 잠시 머무르는 곳이며, 언젠가 고향인 화북 지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정치를 하찮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정작 중요한 행정 실무와 군대 지휘는 가난하고 힘없는 집안 출신 중 귀족에게 아첨하는 자들이 맡게 되었고요. 귀족은 황제의 명령도 "무능한 황제보다 내가 더 낫다"며 무시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렇게 정치와 국방이 귀찮은 일로 여겨진 탓에 중국 남쪽에 세워진 왕조들은 모두 수명이 짧았어요. 수많은 나라가 세워졌다 망하길 반복하는 동안에도 귀족들의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무고한 백성만 원성과 한탄 속에서 살아야 했지요.
◇수나라 문제가 천하를 통일했지만…
긴 혼란을 잠재우고 중국을 통일한 주인공은 북주의 황제 자리를 빼앗아 수나라를 세운 양견(문제)이었어요. 앞서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는 유목민의 풍습을 한족의 풍습으로 바꾸는 한화(漢化)정책으로 황제의 권력을 강화해 중국 북부를 통일하였어요. 하지만 한화정책은 유목민의 반발을 일으켰고, 북위는 다시 동위(북제·北齊)와 서위(북주·北周)로 찢어졌습니다.
북주는 북위와 정반대로 한족의 풍습을 유목민의 풍습으로 바꾸는 호화(胡化)정책을 추진해 강력한 군대를 꾸렸고, 이를 바탕으로 북제와 여러 나라를 무너뜨려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어요. 그런데 북주의 뛰어난 군주인 무제가 이른 나이에 죽고 정치가 혼란스러워지자 북주의 실력자였던 양견이 실권을 장악하고 황제 자리를 빼앗아 수(隋)나라를 세웠어요. 양견의 수나라는 후량과 진(陳)나라를 무너뜨리고 589년 대륙을 통일했습니다.
우리에게 '고구려를 침략한 수나라 황제'로 잘 알려진 양견은 사실 국내 정치에선 탁월한 능력을 보였어요. 남쪽 귀족의 사치와 무능, 부정부패를 잘 알고 있었던 양견은 과거제도 실시, 세금제도 개혁, 사치 금지 등을 통해 귀족 세력을 철저히 견제하였습니다. 하지만 본인과 아들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며 국력을 소진한 탓에 민심을 잃었고, 수나라는 건국 50여 년 만에 당나라에 멸망하는 운명을 맞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