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보어인과 영국인, 줄루족 땅 빼앗고 흑인 차별했어요

입력 : 2017.03.23 03:09

[남아공의 흑백 갈등]

백인 우월 의식 네덜란드인들, 케이프 식민지 세운 후 흑인 착취
영국 식민 정부도 흑인 감시·억압
인종차별 악명 '아파르트헤이트'… 1994년 만델라 대통령 취임 후 종결

아프리카 대륙 남단에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한때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악명 높은 정책이 있었습니다. 남아공 국민을 백인과 흑인, 유색인종으로 나누어 인종 간 거주 지역을 통제하고 흑인이 대중 버스나 공공시설을 이용할 때 여러 제한을 두는 인종차별 정책이었지요.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아파르트헤이트는 1993년까지 지속되었고, 이듬해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취임한 뒤에야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최근 남아공에서 인종 간 갈등이 다시 일어날 조짐이 보여요. 제이컵 주마 대통령과 여러 정치인이 "백인들의 토지를 몰수해 식민지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자"는 주장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오래전부터 백인이 흑인을 착취하고 차별한 대가를 지금이라도 치르도록 하겠다는 것이죠. 남아공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기에 인종 갈등이 계속되는 걸까요?

◇보어인의 탄생

15세기 전까지 남부 아프리카에는 수천 년 전부터 반투족(반투는 '인간'이라는 뜻)이 살고 있었어요. 이들은 짐바브웨 왕국, 콩고 왕국 등 찬란한 문명을 세워 번영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18세기 후반에는 반투족의 한 갈래인 줄루족에서 '검은 나폴레옹'이라 불린 샤카 왕이 등장해 줄루 왕국을 세웠지요.

그런데 15세기부터 인도로 가려는 포르투갈인들을 시작으로 유럽인들이 하나둘 남아프리카로 이주하기 시작했어요. 17세기 중엽에는 동인도 회사를 앞세운 네덜란드인들이 오늘날 케이프타운 일대에 케이프 식민지를 건설하고 대거 정착하였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그 일대에 살던 흑인을 노예로 삼고 농장을 운영하였어요.

18세기 말 영국이 케이프 식민지를 점령하자 영국인들이 대거 케이프 식민지로 이주해왔습니다. 이후 영국 식민 정부가 영국인을 중시하는 통치를 펼치면서 네덜란드인들은 불만을 품기 시작했어요. 특히 식민 정부가 흑인 노예를 해방하는 조치를 내리자 불만이 극에 달했습니다. 백인 우월 의식을 갖고 있던 네덜란드인들은 흑인 노예 해방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었죠.

이에 네덜란드인들은 하나둘 케이프 식민지 북쪽으로 이주해 식민 정부의 지배에서 벗어나 살기 시작했어요. 이들을 가리켜 네덜란드어로 '농장주'를 뜻하는 '보어(Boer)'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사실 흑인 노예를 해방한 영국 식민 정부도 흑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어요. '통행법'을 만들어 해가 지면 흑인은 거리에 다니지 못하게 할 정도로 엄격한 통제와 감시, 차별을 하였습니다. 보어인들도 비슷한 흑인 차별을 계속하였고요. 이런 관행과 악법이 이어져 훗날 아파르트헤이트로 발전한 것이죠.

◇다이아몬드가 부른 보어전쟁

케이프 식민지 북쪽으로 이주한 보어인들은 줄루족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당시 줄루 왕국의 왕 딩가네는 의심이 많고 흉포한 성품을 가졌는데, 그는 북쪽으로 이주한 보어인들이 줄루 왕국을 노리는 것이라 의심했어요.

결국 딩가네는 보어인들을 잔치에 초대한 뒤 잔혹하게 죽이는 '통곡의 학살'로 선제공격을 하였어요. 기습을 당한 보어인은 전열을 가다듬어 줄루 왕국과 전쟁을 벌였지만 패하고 말았어요. 보어인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전쟁에 뛰어든 '세계 최강' 영국군도 줄루 전사(임피·impi)의 용맹함을 당해내지 못했고요.

1838년 줄루족이 보어인들의 거주지를 습격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에요. 18세기 말 이후 남아프리카에서는 줄루족과 보어인, 영국인 사이에 갈등과 전쟁이 계속되었어요.
1838년 줄루족이 보어인들의 거주지를 습격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에요. 18세기 말 이후 남아프리카에서는 줄루족과 보어인, 영국인 사이에 갈등과 전쟁이 계속되었어요. /위키피디아

재차 전열을 가다듬은 보어인들은 신중한 군사작전을 펼쳐 줄루 왕국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고, 케이프 식민지 북쪽에 보어인의 나라인 나탈리아 공화국을 수립하였답니다. 하지만 나탈리아 공화국은 영국 식민 정부의 압력에 굴복해 케이프 식민지로 편입되고 말았지요. 이에 보어인들은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여 트란스발 공화국(1852년)과 오렌지 자유국(1854년)을 세웠어요.

보어인이 세운 두 나라와 영국 식민 정부, 줄루족 간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에서 다이아몬드와 금이 대거 발견되었기 때문이었죠. 농장을 운영하던 보어인들도 너나 할 것 없이 광산으로 달려갔고, 케이프 식민지에 사는 영국인들도 두 나라로 넘어가 광맥을 찾을 정도로 남아프리카에는 다이아몬드 열풍이 불었어요. 이에 영국인과 보어인 사이에 다이아몬드와 금 광산을 둘러싼 이권 다툼이 벌어지기 시작했답니다.

다이아몬드를 탐낸 영국은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어요. 이 전쟁이 바로 보어전쟁(1899~1902)입니다. 초반에는 지형을 이용해 게릴라 전술을 펼친 보어인 군대가 선전하였지만, 3년 만에 항복하고 말았어요. 당시 보어인 인구는 50만명, 군대는 7만명 정도였는데 영국 정부가 무려 45만명의 군대를 투입해 보어인의 농장과 집을 깡그리 불태우는 전멸 작전을 펼친 결과입니다.

줄루 왕국도 무사하지 못했어요. 줄루 전사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했던 영국군은 1879년 줄루 전쟁에서는 개틀링 기관총을 가져가 대승을 거두었어요. 줄루 왕국은 여러 부족으로 분할되었고, 마지막 왕 세츠와요가 사망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영국은 1909년 줄루 왕국의 땅과 케이프 식민지, 트란스발 공화국, 오렌지 자유국 전체를 하나로 묶어 '남아프리카연방(남아연방)'을 수립하였어요. 남아연방은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1961년 자치령에서 벗어나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독립하였지요. 하지만 케이프 식민지 시절부터 시작된 보어인과 영국 백인의 흑인·유색인 차별은 남아공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를 청산한 남아공이 상처 깊은 역사까지 잘 이겨내고 진정한 화합을 이뤄내길 기원해 봅니다.

 

윤형덕 한일고 역사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