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왕 자리 놓고 형제끼리 목숨 걸고 싸웠어요

입력 : 2017.02.28 03:10

[왕자들의 권력 다툼]

동생에게 밀려 왕좌 뺏긴 임해군, 반란 우려한 광해군이 귀양 보내
강화도로 유배지 옮긴 뒤 죽음 맞아
태조 왕건의 아들들도 왕위 다툼… 광종 즉위한 후에야 잠잠해졌어요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된,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의 장남 김정남 사건을 보면서 많은 사람이 조선조 '왕자의 난(亂)'을 떠올렸어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자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치열한 싸움을 벌인 사건이지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첫째 부인에게서 방간, 방원을 비롯한 여섯 아들을, 둘째 부인에게서 방번과 방석 두 아들을 낳았어요. 태조가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방원은 이에 반발해 1398년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석과 방번을 살해하였어요. 1400년에는 형 방간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지만 이를 제압한 뒤 3대 왕 태종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이처럼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놓고 혈육 간에 목숨을 건 다툼은 우리 역사에 종종 있었답니다.

◇친형을 죽음으로 내몬 광해군

조선 15대 왕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가 낳은 둘째 아들이었어요.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형 임해군을 제치고 세자가 되어 선조를 대신해 임시로 조정을 이끌었고, 선조가 죽은 뒤에는 측근들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답니다. 임해군은 장자이기에 세자가 되기에 더 유리했지만, 성품이 포악하고 여러 비리를 저질러 선조의 신임을 잃었어요.

광해군이 왕이 되자 중국 명나라가 광해군의 정통성을 문제 삼았어요. 광해군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왕위 계승을 인정받으려 했지만, 명나라는 이를 거부하고 '임해군이 왕이 되지 못한 이유를 알아보겠다'며 조선에 조사단까지 보냈답니다. 광해군과 조선 조정은 조사단에게 엄청난 은과 인삼을 주어 달랜 뒤 간신히 중국으로 돌려보냈어요. 이후 광해군의 측근인 정인홍과 이이첨은 "임해군을 그대로 두면 역모가 일어날지 모르니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어요.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정서용

결국 광해군은 역모죄로 임해군을 진도로 귀양 보낸 뒤 다시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하였는데, 이듬해인 1609년 임해군은 죽음을 맞았어요. 그의 죽음에 대해 광해군이 사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였다는 설과 이이첨이 사람을 보내 임해군을 살해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임해군은 동생 광해군이 왕위를 지키려는 과정에서 희생된 것으로 볼 수 있지요.

◇왕위를 놓고 다툰 왕건의 아들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나라를 안정시킨다는 이유로 권력이 있는 지방 호족의 딸과 결혼하는 혼인 정책을 펼쳤어요. 이 때문에 배다른 형제를 둔 왕건의 아들들이 왕 자리를 놓고 다투는 일이 벌어졌답니다.

943년 왕건의 둘째 부인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 왕무가 2대 왕 혜종이 되었어요. 하지만 오씨는 다른 후궁들에 비해 세력 기반이 약해 혜종의 정치적 입지는 아주 불안했답니다. 왕건도 이런 점을 의식한 듯 왕무를 태자로 삼으며 측근들에게 "태자를 잘 지켜달라"고 부탁했지요.

하지만 혜종의 이복동생이자 왕건의 셋째 부인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아들 왕요·왕소 형제는 혜종이 왕이 된 이후에도 호시탐탐 왕 자리를 노렸답니다. 어머니 유씨가 충주의 힘 있는 호족이자 장군인 유긍달의 딸이었기에 왕요와 왕소를 왕으로 만들려는 세력은 점점 더 커졌어요.

이에 혜종의 측근들은 "왕요 형제가 왕위를 넘보고 있으니 이들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혜종은 이 말을 뿌리치고 오히려 자신의 맏딸을 왕소에게 시집 보내기도 했어요. 하지만 왕요 형제의 위협은 계속되었고, 이에 시달리던 혜종은 왕이 된 지 2년 4개월 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어요.

혜종의 죽음에 대해 여러 역사학자는 "혜종이 왕요 형제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고려사'에는 혜종이 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병 이름이 분명하지 않은 데다 혜종이 살해 위협을 걱정하며 늘 군사를 시켜 자신을 호위하게 한 점 등이 미심쩍다는 것이죠.

혜종이 죽은 뒤 왕요는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3대 왕 정종이 되었지만, 4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이에 동생 왕소가 4대 왕 광종이 되었습니다. 광종이 과거제도와 노비안검법을 도입해 외척과 지방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고려 왕실은 비로소 안정을 찾았답니다. 하지만 광종도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수많은 신하를 숙청하고 혜종과 정종의 외아들을 살해하는 무시무시한 공포정치를 펼쳤어요.

☞조선 임금 27명 중 적장자는?

적장자(嫡長子)는 과거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을 때 본부인이 낳은 맏아들을 가리킵니다. 예로부터 임금의 자리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적장자가 물려받는 것이 기본적인 승계 원칙이었지요.

하지만 태조 이성계를 제외한 조선시대 26명의 왕 중 적장자는 단 7명뿐입니다. 2대 왕 정종, 3대 왕 태종은 각각 태조의 둘째, 다섯째 아들이었고, 세종 역시 태종의 셋째 아들이었어요.

5대 왕 문종이 처음으로 적장자 원칙에 따라 왕위를 받았고, 문종의 뒤를 이은 단종도 적장자였어요. 하지만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가 되면서 적장자 계승은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이후 적장자 임금은 연산군·인종·현종·숙종·순종이 있었는데, 이 중 요절하거나 폐위되지 않고 오래 임금 노릇을 한 왕은 숙종밖에 없었어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