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클래식 따라잡기] 클래식·재즈·오페라까지… 세계를 유혹한 '누에보 탱고'

입력 : 2017.02.25 03:08

[탱고 작곡가 피아졸라]

세 살 때 아버지와 뉴욕으로 이주… 반도네온 연주자로 명성 쌓아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작곡에 열중, 춤곡 탱고에 클래식·재즈 도입
새로운 탱고 개척해 거장 등극… 김연아도 그의 곡으로 연기 펼쳤죠

강렬하다가도 때로는 너무나 구슬픈 탱고(Tango)는 19세기 후반 남미에서 태어난 음악입니다. 이 무렵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는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항구와 도시의 빈민가에 한데 모여 살았어요. 이때 유럽 계통의 춤곡과 아프리카 민속 음악이 결합되어 탱고가 되었다는 게 정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아르헨티나에서는 탱고가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고 20세기 초부터는 아르헨티나를 상징하는 음악이 되었지요.

탱고가 클래식 음악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건 아르헨티나 출신 작곡가 겸 반도네온 연주자 아스토르 피아졸라(1921~1992·사진) 덕분입니다. 피아졸라는 '탱고의 혁명가'로 불릴 만큼 독창적이고 획기적인 탱고 작품을 내놓아 오늘날 "탱고 음악을 새로운 경지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아요. '리베르탱고(Libertango)' '오블리비온(Oblivion)' 등 우리에게 익숙한 탱고 음악도 전부 피아졸라의 작품입니다. 지난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가 프리 스케이팅을 펼칠 때 흘러나왔던 '아디오스 노니노(Adiós Nonino)'도 피아졸라의 대표 작품 중 하나예요.

◇아버지, 그리고 선생 불랑제와의 만남


1921년 아르헨티나 마르 델 플라타에서 태어난 피아졸라는 세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습니다. 뉴욕 빈민가 뒷골목에서 살게 된 피아졸라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소질을 보였어요. 가난한 이발사였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반도네온(아코디온과 비슷한 악기로 탱고 연주 등에 쓰임)을 선물하였지요. '아디오스 노니노'는 훗날 피아졸라가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게 헌정하기 위해 만든 곡이에요.

탁월한 연주 실력을 보인 피아졸라는 당시 세계적인 탱고 가수였던 카를로스 가르델의 음악 영화에 출연해 반도네온을 연주하며 조금씩 명성을 쌓게 됩니다. 1937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여전히 탱고 밴드의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가슴 한편에는 다른 꿈이 있었어요. 춤을 추기 위한 음악으로 굳어있던 탱고를 클래식 음악 등 다른 음악과 결합하는 새로운 도전을 펼치는 것이었죠.

피아졸라
/Getty Images 이매진스
아르헨티나 최고의 작곡가로 불리던 알베르토 히나스테라를 찾아가 6년간 음악 공부를 한 피아졸라는 다시 1954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나디아 불랑제라는 음악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그간 피아졸라가 쓴 교향곡과 협주곡을 모두 살펴본 불랑제는 "다른 작곡가를 흉내 낸 것만 가득하고, 당신만의 독창성은 보이지 않는다"는 평을 내렸어요. 예상치 않은 악평에 당황한 피아졸라에게 불랑제는 "잘 다루는 악기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조금 주저하던 피아졸라가 반도네온으로 탱고를 연주하자 불랑제는 무릎을 치며 이렇게 말했어요. "이제야 피아졸라의 음악이 나타났군요!"

불랑제는 피아졸라에게 "탱고는 아름다운 음악이다. 당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한 세계를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피아졸라는 불랑제로부터 바흐와 베토벤, 쇼팽 등 전통적인 클래식 작곡가의 음악과 20세기 음악 등을 배우며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나섰어요.

◇탱고를 뒤흔든 '누에보 탱고'

1955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바이올린과 전자기타, 베이스, 피아노 등이 결합된 자신만의 밴드를 결성했어요. 이때부터 피아졸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탱고 음악을 선보이기 시작했답니다. 원래는 4분의 2박자의 춤곡이던 탱고에 복잡한 화성과 다양한 템포, 즉흥적인 카덴차(솔로 악기가 기교적인 음을 연주하며 화려함을 뽐내는 부분) 등을 적용했어요. 기존의 탱고에 클래식과 재즈의 기법을 도입한 것이죠.

이렇게 탱고는 피아졸라를 거쳐 춤을 위한 음악이 아닌 연주하기 좋은 음악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이런 자신의 음악을 피아졸라는 '누에보 탱고(Nuevo Tango)', 즉 '새로운 탱고'라고 불렀어요.

하지만 누에보 탱고를 들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어요. '탱고는 춤곡'이라고 생각한 탓에 리듬에 맞춰 춤을 추기 어려운 피아졸라의 탱고를 좋아하지 않은 것이죠.

훗날 피아졸라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어요. "내가 쓴 새로운 탱고 음악은 기존의 탱고 연주자들과 청중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기독교 신자가 불교 신자나 무슬림이 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죠. 어떤 평론가는 나의 음악에 대해 '오랜 세월을 거쳐 내려온 위대한 미술 작품에 함부로 덧칠을 하는 것 이상으로 정신 나간 짓'이라고도 말하기도 했어요."

◇클래식으로 퍼져 나간 탱고 혁명

피아졸라는 1974년 유럽으로 넘어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때도 피아졸라는 불랑제의 말처럼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탱고를 계속해서 선보였어요. 기존의 탱고 리듬에 클래식의 화성과 구성을 도입하거나, 탱고로 만든 오페라 등을 발표하며 다양한 음악과 탱고의 '퓨전'을 시도했지요.

시간이 흐르자 독특한 그의 음악에 매료되는 사람들이 늘어났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클래식 애호가 사이에서도 그의 음악이 널리 알려졌어요. 요요마, 다니엘 바렌보임 등 유명 클래식 연주자들이 피아졸라의 음악을 연주한 음반을 발표한 덕분이었죠.

이렇게 거장의 명성을 얻기 시작한 1990년, 피아졸라는 뇌출혈로 쓰러졌고 2년간의 투병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하지만 탱고에 대한 편견을 넘어선 피아졸라의 탱고는 오늘날에도 전 세계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가 시도한 탱고 혁명은 분명 성공한 혁명이었어요.


김주영 피아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