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명옥의 명작 따라잡기] 담벼락에 그린 그림, 거리가 미술관으로

입력 : 2017.02.18 03:07

[벽과 예술]

벽을 캔버스로 쓴 예술가 뱅크시, '그라피티 아트'로 큰 인기 누려
티스베와 퓌라모스 가로막은 벽… 연인의 사랑 방해하는 장애물 상징
갈라진 틈새로 서로의 마음 전했죠

작품1
작품1 -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티스베’, 1909년, 캔버스에 유채.
우리 곁에는 늘 벽이 있습니다. 벽은 추위나 더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줘요. 벽이 있기에 나만의 방에서 곰곰이 하루를 돌이켜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친구와 소곤소곤 전화 통화를 하기도 하죠. 때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벽이 원망스럽기도 해요. 친구와 다투고 나면 친구와 나 사이에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요.

19세기 영국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가 그린 작품1에서는 한 젊은 여인이 금이 간 벽에 귀를 대고 무언가를 엿듣고 있어요. 여인의 두 뺨은 붉은 드레스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습니다. 여인은 갈라진 틈으로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 걸까요?

이 여인은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바빌로니아의 아름다운 처녀 '티스베'입니다. 그림에 등장하지 않지만 벽 너머에 있는 청년 '퓌라모스'와 벽의 갈라진 틈 사이로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있어요.

티스베와 퓌라모스는 이웃으로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안타깝게도 양가 부모님은 둘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부모님 몰래 갈라진 틈새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죠. 작품 속 벽은 두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자 결혼을 가로막는 부모님의 반대를 뜻합니다. 하지만 벽이 두 사람의 사랑을 완전히 가로막지는 못하는군요.

벨기에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상식을 깨는 창의성의 도구로 벽을 활용했어요. 작품3에서 한 남자가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되는 양 담벼락을 뚫고 지나갑니다. 꿈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을 마그리트는 왜 그림으로 그린 걸까요?

작품3
작품3 - 르네 마그리트, ‘만유인력’, 1943년, 캔버스에 유채.
마그리트는 상상이 현실이 되는 세상을 꿈꿨던 화가예요. 작품 속 벽은 상상력을 가두는 고정관념이나 인간의 한계를 상징합니다. 상상하면 현실이 된다는 말이 있죠? 마그리트는 틀 속에 갇힌 생각에서 벗어나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상상을 생생하게 그림으로 그렸어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과거 상상으로 지은 SF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했던 일 중 오늘날 현실이 된 것이 많아요. 상상력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마법 같은 힘이 있나 봅니다.

영국 화가 뱅크시는 벽을 캔버스처럼 다룬 것으로 유명합니다. 작품2에서 한 여인이 흰 천을 들어 올리고 청소를 하고 있어요. 천 사이로 보이는 벽은 실제 길거리에 있는 담벼락입니다. 여인과 청소 도구, 흰 천은 뱅크시가 그린 것이고요. 이렇게 길거리나 건물 벽에 그린 그림을 그라피티 아트(graffiti art)라고 합니다. 사실 그라피티 아트는 대부분 불법이에요. 특별히 허용된 장소 외에는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는 걸 법으로 금지하고 있으니까요.

작품2
작품2 - 뱅크시, ‘런던의 메이드’, 2006년.
그런데도 뱅크시는 사람들 몰래 벽에다 그림을 그렸어요. 미술관이나 화랑에 전시된 작품은 소수의 사람만 볼 수 있지만, 길거리의 벽에 그림을 그리면 더 많은 사람이 그림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동시에 뱅크시는 예술로 인정받지 못했던 그라피티 아트에 대한 편견도 깨고 싶어 했답니다.

뱅크시의 작품이 예술성을 인정받아 큰 인기를 끌게 되자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어요. 불법으로 그려진 뱅크시의 그림을 시민들이 지우지 못하게 보호했고, 런던의 건물주들은 '뱅크시가 내 건물 벽에다 그림을 그려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하게 되었답니다. 심지어 뱅크시의 그림이 그려진 런던 거리를 소개하는 관광 지도와 그의 작품을 찾아다니며 감상하는 여행 상품까지 생겨났어요. 뱅크시는 그라피티 아트로 길거리의 벽이 화폭도 될 수 있고 미술관도 될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주었어요.

우리나라 작가 김승영은 벽으로 평화와 통일, 화합을 기원하는 작품을 만들었어요. 작품4는 경기도 김포 월곶면 용강리 인근 군사분계선에 서 있는 철책을 이용해 만든 설치 작품입니다. 남북을 가로막고 서 있는 철조망은 민족이 분단된 현실을 잘 보여주지요.

작품4
작품4 - 김승영, ‘DMZ’, 2016년.
김 작가는 이 철조망에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의 음표를 설치했어요. 음표 아래는 새장 밖으로 나와 노래하는 새와 꽃을 만들어 놓았고요. 언젠가 통일이 되면 분단의 벽이 세워진 이곳에 평화와 화합의 노래가 울려 퍼질 거라는 작가의 믿음과 바람이 담긴 작품입니다.

이렇게 예술가들은 벽을 활용해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었어요. 여러분에게 벽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벽을 활용해 어떤 그림이나 작품을 만들 수 있을지 가족·친구들과 함께 고민해보세요.





이명옥 사비나 미술관 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