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태평양 전쟁 벌였지만…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

입력 : 2017.02.16 03:05

[미·일 관계]

미국 페리 제독 강요로 개항한 일본,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 이뤄
1차 대전 후 만주사변으로 갈등…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 시작
미국, 항복한 일본 비군사화 추진… 냉전 시작되자 안전보장조약 체결

지난 1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했어요. 이번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일본과 중국의 영유권 분쟁에서 일본을 지지하겠다는 뜻을 밝혔어요. 이에 아베 총리는 미국 내에 일자리 70만개를 창출하겠다고 화답했고요.

미국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군사·경제·정치 등에서 긴밀히 협조하는 끈끈한 동맹 관계를 이어오고 있어요. 태평양을 사이에 둔 두 나라의 인연은 언제 시작된 것일까요?

◇페리 제독의 흑선과 메이지유신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은 서구 열강에 폐쇄적인 입장이었어요. 당시 일본을 다스리던 에도막부가 쇄국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이었죠. 그러던 1853년 6월 3일, 낯선 네 척의 검은 군함(흑선)이 일본의 평화로운 어촌 우라가에 나타났어요. 일본과 통상조약을 맺으라는 임무를 받은 미 해군 제독 매슈 페리(1794~1858)가 군함을 이끌고 일본에 도착한 것이죠. 이듬해에도 페리 제독이 흑선을 타고 찾아와 개항을 요구하자 에도막부는 이에 굴복해 미국과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체결하였어요.

이후 다른 서구 열강과도 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 내에서는 에도막부에 대한 반감이 더 커졌어요. "이참에 서구 문물을 수용해 근대적인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세력이 불어난 데다 불평등한 통상조약으로 일본 내 원료들이 과도하게 수출되면서 물가가 치솟았기 때문이죠.

결국 1867년 사카모토 료마를 중심으로 한 반(反)막부 세력의 압력에 에도막부가 무너지고 일왕을 중심으로 한 메이지 정부가 들어섰어요. 메이지 정부는 이듬해 서구식 근대화를 위한 개혁에 착수했답니다. '메이지유신'이 시작된 것이죠.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은 단기간에 자본주의 경제 체제와 입헌군주제를 갖춘 강대국으로 성장했어요. 흑선을 앞세운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가 일본이 근대국가를 이루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죠.

◇만주사변과 태평양전쟁

서구식 근대화로 강국이 된 일본은 국제 관계에서도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를 받아들였어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을 맺어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습니다.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고요.

미·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도 함께 연합국으로 참전해 승전국이 되었어요. 1차 대전 직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주도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유엔의 전신)이 창설되자 일본도 국제연맹에 가입하였지요.

좋아보이던 두 나라의 관계는 그 이후로 나빠지기 시작했어요. 1921년 미국이 워싱턴 회의를 통해 일본의 군비 확장을 제한하고 중국과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줄이자 일본은 미국에 불만을 품게 되었답니다.

1929년 경제 대공황이 전 세계를 덮치자 2년 뒤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를 식민지로 삼았어요. 군국주의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전쟁과 식민지 개척을 경제 위기를 벗어날 해법으로 삼은 것이죠. 미국이 일본의 만주 침략을 비난하자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해버렸어요.

두 나라의 갈등은 결국 전쟁으로 치달았어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지자 부족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침략했어요. 동남아시아에 식민지와 영향력을 갖고 있던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일본에 석유 수출을 금지하는 강경책을 내렸답니다.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을 받은 미군 기지의 모습이에요.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을 받은 미군 기지의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

미국과의 교섭에도 별다른 성과가 없자 일본은 또다시 전쟁을 해법으로 택했어요.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하와이 오아후 섬 진주만에 머물던 미국 태평양 함대에 대규모 기습 공격을 감행하면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기습공격을 가했던 일본이 기세를 잡는 듯했지만, 경제력과 군사력 등 국력에서 앞선 미국이 곧 전세를 뒤집었어요.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일본은 점점 수세에 몰렸습니다. 미 공군의 폭격으로 일본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에야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어요. 일본이 패망하면서 우리 민족도 광복을 맞게 되었지요.

◇전후 처리와 냉전

일본이 항복한 뒤 미군은 도쿄에 연합국군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를 설치하고 일본을 무장해제하는 비군사화 정책을 추진했어요. 미군은 일본의 군수 생산을 금지하고 일본군을 해체해버렸어요. 태평양전쟁을 주도한 전범들을 체포해 법정에 세웠고요. 일본은 전쟁을 포기하며 군대도 보유하지 않는다는 신헌법(평화헌법)도 공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공산당 정부가 수립되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의 대일본 정책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일본을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저지할 중심축으로 여기게 된 것이죠. 1951년 미국은 일본과 안전보장조약을 맺어 군사 동맹 관계를 구축했어요. 일본은 헌법으로 금지된 공식 군대 대신 자위대를 보유하게 되었고요.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소련·중국·북한과 한국·미국·일본이 대립하는 치열한 냉전이 이어졌습니다.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며 냉전이 끝난 뒤에도 미국과 일본은 동맹으로서 북한·중국 등을 상대해 긴밀한 협조 관계를 이어오고 있어요.

☞日 경제 성장과 '재패노포비아'

2차 대전으로 폐허가 된 일본은 6·25 전쟁 이후 빠른 경제 성장을 이뤘어요. 1980년대가 되자 미국 다음가는 ‘제2의 경제 대국’이 되었답니다.

그러자 미국 내에는 ‘일본이 미국 을 제치고 최강대국의 자리도 빼앗는 게 아니냐’는 재패노포비아(Jap anophobia·일본 공포증)가 퍼졌어요. 일본 자본이 뉴욕을 상징하는 록펠러센터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인수에 참여하자 이런 우려는 더 커졌지요.

하지만 1990년대가 되자 재패노포비아는 잠잠해졌어요. 이때부터 일본은 심각한 장기 경제불황(잃어버린 10년)에 빠졌지만 미국은 전례 없던 경제호황을 누렸기 때문이죠.

김승호 인천포스코고 역사 교과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