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대만이 올림픽에서 국기를 들지 못하는 이유는?

입력 : 2017.02.09 03:10

['하나의 중국']

트럼프, 당선 후 대만 총통과 통화… '하나의 중국' 원칙 부정 뜻 비쳐
국공내전 벌였던 중국과 대만, 서로 자신이 합법적인 정부라 주장
1970년대 미국·중국 수교 이후 대만은 정식 국가로 인정 못 받죠

최근 'G2'라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고 있어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 직후 차이잉원 대만 총통과 통화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중국의 무역 정책을 비판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대만 총통과의 통화로 '중국이 미국에 협조하지 않으면 중국 정부가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을 비친 것이죠.

'하나의 중국'은 "중국 대륙과 대만, 홍콩, 마카오 등은 별개 나라가 될 수 없으며, 오직 합법적 정부는 하나만 있다"는 원칙입니다. 이 원칙은 독립을 주장하는 중국 내 소수민족에게도 적용되고 있어요. 이 원칙에 따라 중국 정부는 자신과 외교 관계를 맺는 나라에 대만 정부와 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해왔습니다. 이에 맞서 대만도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며 "중국을 대표하는 합법적 정부는 중국 정부가 아닌 대만 정부"라는 태도를 보였어요.

◇국공내전과 대만

대만이 중국 역사에 등장한 건 16세기 무렵입니다. 중국 대륙과 무관하게 여러 부족이 살고 있던 대만 섬을 아시아로 진출한 스페인과 네덜란드인들이 점령했어요. 이후 만주족의 침략으로 명나라가 멸망하자 정성공이 대만에 넘어와 서양 세력을 몰아내고 명나라 부흥 운동의 거점을 마련했답니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가 정성공 세력을 진압하면서 대만은 청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어요. 청나라 말기에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만을 할양받았지요.

중국과 대만의 대립은 20세기 초에 시작된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갈등에서 비롯되었어요.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세워졌지만 중국 전역은 여러 군벌(軍閥·사병을 모아 지방을 지배하던 군인 세력)이 나누어 차지하고 있었답니다. 이에 중화민국 수립을 주도했던 국민당은 공산당과 손을 잡고 군벌 토벌에 나섰어요(1차 국공 합작).

그런데 국민당을 이끌던 쑨원이 죽자 국민당 군대를 이끌던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당을 장악했답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장제스는 공산당과 합작을 중단하고 공산당과 군벌을 동시에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민당 군대의 공세에 공산당은 전멸 위기에 몰렸지만, 중국 북서부 옌안으로 이동하는 대장정을 통해 무너진 조직을 정비할 기회를 마련했어요.

1945년 마오쩌둥(왼쪽)과 장제스(오른쪽)가 일제의 패망을 기뻐하며 건배하는 모습이에요. 두 사람은 제2차 국공 합작으로 함께 일제에 맞섰지만, 일제가 패망한 이후 중국 대륙의 패권을 놓고 내전을 벌였어요.
1945년 마오쩌둥(왼쪽)과 장제스(오른쪽)가 일제의 패망을 기뻐하며 건배하는 모습이에요. 두 사람은 제2차 국공 합작으로 함께 일제에 맞섰지만, 일제가 패망한 이후 중국 대륙의 패권을 놓고 내전을 벌였어요. /위키피디아

장제스는 재차 공산당을 공격하려 했지만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의 위협이 커지고 부하들의 반발이 일어나면서 다시 공산당과 손을 잡고 중일전쟁에 나섰어요(제2차 국공 합작).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대만을 돌려받게 되자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시 내전에 돌입했답니다.

내전 초기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이 우위를 보였지만, 시간이 흐르자 전세는 공산당에 유리해졌어요. 국민당 관료들이 지나치게 무능하고 부패한 탓이었죠. 1949년 공산당이 중국 대륙 전체를 차지하자 장제스는 본토인 약 200만명을 이끌고 대만으로 탈출했어요. 장제스는 대만 토착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한 뒤 타이베이를 새로운 중화민국의 수도로 정했답니다. 그해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언하였어요.

◇'하나의 중국'과 양안 관계


이후 두 나라는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였어요. 1960년대까지는 미국 지원을 받은 대만이 유엔 상임이사국을 차지하는 등 국제 무대에서 앞서갔답니다. 무력 통일을 내세우던 중국은 미국과 갈등을 피하기 위해 평화적·정치적 통합을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했지요.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 대만과 중국의 위치는 완전히 뒤바뀌었어요. 베트남전 패배를 계기로 공산권 국가와 관계 개선에 나선(데탕트·프랑스어로 '휴식') 미국이 중국 정부가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을 수용했기 때문이죠.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하고 '미·중 공동 성명'을 통해 중국 정부를 중국인들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인정했답니다. 그 결과 대만은 국제사회에서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가 됐어요. 유엔은 물론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 같은 주요 국제기구에서도 추방당했고, 미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일본 등 중국과 수교한 나라와 모두 공식 외교 관계가 끊어졌답니다. 미국은 비공식적 외교 관계로 대만을 지원하고 있지만 여전히 대만은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후 양안 관계는 대만 정치 상황에 따라 우호와 갈등을 반복하고 있어요. 근래 대만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과 "하나의 중국을 버리고 대만이 별개 국가로 독립해야 한다"는 입장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답니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대만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중국은 여전히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며 대만 독립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어요.

☞쯔위가 흔든 '청천백일기'

청천백일기 사진

대만 국기는 ‘청천백일기’입니다. 붉은 바탕에 하얀 태양이 푸른 하늘에 떠있는 모습은 쑨원의 삼민주의를 상징하지요. 중화민국의 국기로 만들어졌지만 국민당 정부가 대만에 정착하면서 자연스레 대만의 국기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대만은 올림픽 등 각종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이 국기를 사용하지 못해요. 중국 탓에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도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대만 운동선수들이 국제 대회에 나갈 때에는 국기 대신 대만 올림픽위원회의 깃발을 사용합니다.

지난해에는 아이돌그룹 ‘트와이스’의 대만 출신 멤버 쯔위가 방송에서 청천백일기를 흔들었다가 중국 네티즌의 비난을 받는 일이 있었어요.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는 중국 사람들이 대만을 상징하는 청천백일기를 인정하지 않아 생긴 일이었죠.

윤형덕 하늘고 역사 교과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