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클래식 따라잡기] 자유로운 실험 정신 베토벤, 그를 롤 모델 삼은 브람스

입력 : 2017.01.14 03:08

[베토벤과 브람스]

'음악의 성인'으로 불린 베토벤
악장 수 바꾸고 교향곡·합창 접목, 자유로운 음악 좇은 낭만주의 열어

브람스, 베토벤 따라잡기 위해 악보 썼다 지우며 음악 공부 전념
형식 잘 지켜 '신고전주의자' 별칭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1월 1일 떠오르는 첫 해를 보며 두 작곡가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17년은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지 190년, 브람스가 사망한 지 120년이 된 해이기 때문이죠.

수많은 걸작을 남긴 베토벤과 브람스는 각각 '악성(樂聖·음악의 성인)' '신고전주의자'라는 별칭을 갖고 있어요.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살진 않았지만 음악을 통해 선후배가 되었고, 뛰어난 걸작으로 당대 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어요.

◇자유로운 음악을 위한 실험과 도전

베토벤은 실험 정신이 뛰어난 음악가였어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집안 형편이 어려워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고, 악기와 연주 등 많은 부분을 독학으로 익혔지요. 그래서인지 베토벤은 자립심이 무척 강하고 어려움이 예상되는 일도 과감하게 뛰어드는 도전적인 사람이었어요.

베토벤이 지휘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브람스는 베토벤을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답니다.
베토벤이 지휘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에요. 브람스는 베토벤을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답니다. /AFP
그의 성격은 작품에도 반영되었어요. 다른 사람이 꺼리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시도를 베토벤은 거침없이 감행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전통으로 여겨진 악장의 숫자를 과감하게 바꾼 것이지요.

베토벤이 활동하던 때 작곡가들은 소나타는 반드시 악장 3~4개로 이루어져야 하며 협주곡은 악장 3개로 만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베토벤은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 악장의 숫자를 줄이거나 2개 이상의 악장을 하나로 연결해 쭉 이어서 연주하는 실험적인 작곡을 했습니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에 비해 악장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악장 2개로 된 소나타(22번, 24번, 32번 등)를 내놓기도 했지요.

베토벤의 실험 정신이 가장 빛나는 작품은 그의 마지막 교향곡 '합창'이에요. 그는 이전까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독창적 아이디어를 교향곡에 담았습니다. 합창을 교향곡에 절묘하게 접목시킨 것이죠.

'합창' 교향곡을 쓰기 전 베토벤은 이미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합창이 결합된 독특한 편성의 '합창 환상곡'으로 기악과 성악을 결합하는 실험을 했어요. 그리고 자신의 실험이 좋은 음악을 만들어냈다는 확신이 들자 합창이 결합된 70분짜리 거대 교향곡을 만들어 세상에 선보인 것이죠.

처음 합창 교향곡을 들은 청중들은 '이게 정말 교향곡인가'라고 생각하며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곧 편견과 선입견에 매이지 않고 여러 번의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친 베토벤의 뚝심과 용기가 담긴 걸작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이렇게 베토벤은 작곡가의 감정과 기분을 드러내기 위해 악장 구성과 연주 편성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낭만주의를 처음으로 실현한 음악가로 역사에 남게 되었지요.

◇실험가를 좇아 신고전파가 되다

브람스는 베토벤이 죽은 지 6년 후인 1833년에 태어났어요. 브람스는 타고난 노력가이자 완벽주의자였습니다. 가난한 음악가 아버지를 둔 브람스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성실하게 음악 공부를 했어요. 브람스의 기념관에는 그가 너무 열심히 음표를 그려 구멍이 난 악보들이 남아 있어요. 그가 이렇게 노력한 이유는 음악을 사랑하기도 했지만 베토벤을 자신의 '롤 모델(role model)'로 삼았기 때문이에요. 모든 면에서 위대했던 선배를 따라잡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이죠.

노력이 빛을 발하면서 브람스가 작곡한 다양한 장르의 곡들이 큰 인기를 얻었어요. 그렇게 브람스는 '잘나가는 작곡가'가 되었지만, 유독 발표에 신중을 기했던 작품이 있었습니다. 바로 교향곡이었죠.

위 사진은 1894년 ‘신고전주의자’로 불리는 브람스(오른쪽)와 ‘왈츠의 황제’로 불리는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함께 찍은 사진이에요. 아래 사진은 브람스가 직접 쓴 1번 교향곡 악보입니다.
위 사진은 1894년 ‘신고전주의자’로 불리는 브람스(오른쪽)와 ‘왈츠의 황제’로 불리는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함께 찍은 사진이에요. 아래 사진은 브람스가 직접 쓴 1번 교향곡 악보입니다. /위키피디아·The Morgan Library

베토벤의 교향곡과 버금가는 교향곡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브람스는 좋은 악상(樂想·음악의 주제, 구성 따위에 관한 착상)이 떠올라 작곡을 한 뒤에도 곡에 더 깊은 의미를 담기 위해 편성과 구성을 거듭해서 바꾸었어요.

브람스의 첫 번째 교향곡(1번 교향곡)은 그가 43세가 되던 해에 발표되었습니다. 브람스의 교향곡을 들은 사람들은 "베토벤의 교향곡 이후 최고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보냈어요. 위대한 선배를 따라잡기 위한 간절한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이죠. 브람스의 1번 교향곡에서는 선배 베토벤의 자취가 담겨 있습니다. C단조의 조성(調性·주된 음과 화음에 따라 결정되는 곡조의 성질)에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4악장의 멜로디에서 '합창' 교향곡의 악상과 비슷한 점을 찾아볼 수 있지요.

하지만 브람스가 무작정 베토벤의 음악을 따라 하거나 흉내 낸 건 아니에요. 브람스가 활동했을 때 음악계는 베토벤이 문을 연 낭만주의가 유행했어요. 반면 브람스는 작품을 쓸 때 고전파 작곡가들이 중시한 형식과 구성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가 '신고전주의자'로 불리게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죠.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음을 절제해 간결하고 깔끔한 느낌의 곡들을 썼어요.

이런 면에서 브람스는 실험을 추구한 베토벤과는 전혀 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당대의 주류에서 벗어나 처절한 노력으로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었고, 지금도 많은 이에게 깊은 울림을 전하는 걸작을 남긴 위대한 음악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요.


 

김주영 피아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