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신하들 정치 싸움에 선조실록 두 개 만들어졌어요

입력 : 2016.12.13 03:05

[역사를 둘러싼 갈등]

최근 역사 국정교과서 찬반 엇갈려… 조선시대에도 역사 두고 대립
인조반정 이후 권력 잡은 서인, 북인이 만든 '선조실록' 문제 삼아
서인 입장에서 쓴 '수정실록' 편찬… 현종실록은 처음부터 새로 쓰기도

지난달 28일 교육부가 중·고교 역사 국정교과서 현장 검토본을 공개하면서 찬반 여론이 엇갈리고 있어요. '수정할 오류들이 있지만 중립적으로 잘 쓰였다'는 의견과 '서술 내용이 미흡하고 편향된 부분이 많다'는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교육부는 정확한 지적을 반영한 최종본을 만들겠다고 밝혔지요.

국정교과서를 찬성하는 측에서는 "국정교과서가 역사를 둘러싼 불필요한 이념 논쟁을 줄일 수 있다"는 입장이에요. 반대 측에선 "한 종류의 국정교과서를 사용하면 역사를 보는 관점의 다양성이 훼손된다"는 입장이고요.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갈등이 벌어진 적이 있었어요. 우리 조상들은 역사를 기록해 후손에게 전해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러한 생각에 정치적 갈등이 더해지면서 역사를 둘러싼 대립이 있었던 것이죠.

◇사초부터 엄격하게 다룬 '조선왕조실록'

많은 역사학자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여러 역사책 중에 권력자의 명령이나 특정 세력의 영향력에 크게 치우치지 않는 역사책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손꼽아요. 조선왕조실록만큼 편찬 과정이 까다롭고 엄격한 역사책은 전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에는 매일 궁궐에서 벌어진 일들을 사관(史官)들이 적은 사초(史草)라는 문서가 기본 자료로 사용되었어요. 사초는 세 차례에 걸친 수정 작업을 거쳐 춘추관에 보관되었다가 임금이 승하(昇遐·임금이나 존귀한 사람이 세상을 떠남을 높여 이르던 말)하면 실록 원고를 쓰는 기초 자료로 사용되었지요.

조선은 건국 초부터 사초를 마음대로 없애거나 고친 사람, 사초의 내용을 밖에 새어나가게 한 사람은 사형에 처할 정도로 사초를 엄격하게 다루었어요. 심지어 임금도 사초나 실록을 맘대로 꺼내어 볼 수 없었답니다. 임금이라는 이유로 사초를 마음대로 꺼내어 보고 그 내용을 고치게 된다면 객관적인 사실을 남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한 임금을 두고 두 개의 실록이 편찬되다

이렇게 사관은 정치적인 간섭 없이 객관적으로 사초를 쓸 수 있었어요. 하지만 관리들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지나친 정치적 다툼을 벌이면서 한 임금 때의 일을 두고 두 개의 실록이 편찬되는 일도 벌어졌답니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어요. 선조실록은 광해군 때 권력을 잡았던 북인들이 편찬한 것입니다. 그런데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면서 서인들이 권력을 잡게 되었어요. 그러자 서인들은 "북인 세력이 편찬한 선조실록은 서인 출신 인물을 공정하게 기록하지 않았다"며 실록의 내용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결국 서인의 뜻대로 내용을 수정해 편찬된 것이 바로 '선조수정실록'이에요.

기사 관련 그림
그림=정서용

숙종 때에는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이 편찬되는 일이 있었어요. 당시에는 남인과 서인이 서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남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 편찬된 것이 '현종실록'입니다. 그런데 경신환국이 일어나면서 서인들이 권력을 잡게 되자 현종실록이 편파적이라고 주장하며 '현종개수실록'을 편찬하였어요. '숙종실록보궐정오' '경종수정실록'도 새로 권력을 잡은 세력이 기존에 편찬된 실록에 불만을 품고 자기의 시각에 맞추어 편찬한 실록들이죠.

◇수정실록·개수실록·보궐정오의 차이는?

그런데 수정된 실록들의 이름이 제각각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수정실록'은 본래의 실록에서 일부 내용을 고치는 수준으로 편찬된 것을 뜻합니다. '개수실록'은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 만들었음을 뜻하는데 본래 실록보다 분량도 더 많아요.

'보궐정오'란 따로 책을 내지 않고 부분적으로 수정·보완한 내용을 기존 실록의 매 권 끄트머리에 합쳐 넣은 것입니다. 수정된 실록 중에 고친 범위가 가장 작다고 할 수 있지요.

조선왕조실록은 대체로 공정하고 엄격하게 쓰였지만, 정치적 갈등이 심각해졌을 때에는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어요. 그럼에도 우리 조상들은 실록을 새로 편찬한 뒤에도 반대 정파에서 만든 실록을 없애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었답니다. 덕분에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두 실록을 비교·검토하며 조선시대에 있었던 일을 연구할 수 있지요.

☞경신환국(庚申換局)

숙종 때인 1680년(경신년)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들이 줄줄이 죽음을 당하거나 관직에서 쫓겨나고 반대 정파인 서인들이 권력을 잡게 된 일을 뜻합니다.

경신환국은 남인의 우두머리였던 영의정 허적이 벌인 큰 잔치에서 비롯되었어요. 잔칫날 비가 내리자 허적은 하인을 궁궐에 보내어 유악(?幄)을 빌려오게 하였어요. 유악은 기름을 먹여 비가 새지 않게 만든 군사용 천막으로 당시에는 사적으로 쓸 수 없게 되어 있었어요.

임금의 허락도 없이 허적이 유악을 빌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숙종은 크게 화를 내어 남인이 갖고 있던 군사권을 반대파인 서인에게 넘겨주었어요. 얼마 뒤 허적의 가족과 그를 따르던 남인들은 역적으로 몰려 처형을 당했고, 정국의 주도권은 서인이 잡게 되었어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