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산을 닮은 화가가 그려낸 한국의 산
['유영국, 절대와 자유'展]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 개최
묵묵히 자리 지키는 산의 모습… 강한 원색으로 생명력 불어넣어
78세에도 새로운 각오·열의 다져 엄격한 생활하며 그림 그렸어요
유영국(1916~2002·사진)은 김환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꼽히는 화가예요. 지난달부터 서울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올해로 유영국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된 것을 기념해 그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답니다.
유영국의 그림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아요. 사람이 사는 도시는 세대가 바뀌고 유행이 달라지면 쉼 없이 무언가 생겨나고 무언가는 사라지지요. 하지만 자연은 계절에 따라 모습을 바꾸면서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킵니다.
유영국은 이런 자연과 같이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삶을 살길 원했고, 이런 생각을 화폭에 담고 싶어 했어요. 그런 그가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일생의 주제로 삼은 대상이 바로 산(山)입니다. 유영국이 그린 산을 마주하면 그의 세련된 색감에 한 번 놀라고 그 색채가 뿜어내는 엄청난 에너지에 또 한 번 놀라게 되죠.
작품1을 보세요. 붉은색으로 표현된 불꽃같이 강렬한 산의 모습이 보입니다. 작품2는 짙은 침묵이 내려앉은 청색의 산, 작품3은 아른거리듯 부드러운 붓질로 노랗게 빛나는 산이 캔버스에 담겨 있어요. 깨끗한 흰색과 차분한 흙색, 은은한 비취색을 좋아하는 한국인에게 이토록 진한 원색의 본능이 숨어 있다는 것에 절로 놀라게 됩니다.
- ▲ 작품1 - ‘작품’, 1967(사진 위). 작품2 - ‘산’, 1968(사진 아래 왼쪽). 작품3 - ‘작품’, 1965(사진 아래 오른쪽).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유영국, 절대와 자유’展
다른 동료 화가들이 차분한 단색 그림에 심취하고 있을 때 유영국의 팔레트에는 생동감 있게 튀어오르는 원색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어요.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내면에 깊이 잠자고 있던 원색의 본능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죠. 어쩌면 그것은 꿈틀거리는 산의 생명력인지도 몰라요.
유영국의 고향 경북 울진에서는 동쪽으로 바다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산이 보입니다. 그가 기억하는 산은 봄에는 노랑, 여름에는 초록, 가을에는 빨강, 겨울에는 파랑으로 색을 갈아입어요.
산은 늘 같은 자리에 있지만 계절에 따라, 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늘 다른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나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은연 중에 평생 산을 보며 살아갑니다. 외국에 나가 사방팔방 막힌 곳 없는 평지를 만나서야 "한국에서는 내가 줄곧 산에 둘러싸여 살았구나" 새삼 깨닫게 되지요.
미국의 대평원 지대는 바람을 막아 줄 산이 없어 이곳저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뭉쳐 회오리처럼 빙빙 돌아요. 그 바람이 더 세지면 거대한 토네이도로 변해 사람들을 덮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지요.
그래서 산은 우리를 감싸고 아늑하게 지켜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어려운 시기마다 우리 조상들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산을 보면서 흔들리고 약해지는 마음을 굳건히 다잡곤 하였어요.
- ▲ 작품4 - ‘산-푸른 산’, 1994.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유영국, 절대와 자유’展
평생 산을 그린 유영국은 산처럼 굳건한 마음을 가진 화가였어요. 많은 화가가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자유로운 생활을 했지만, 유영국은 엄격한 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렸답니다.
자신의 집에 작업실을 두었지만 결코 느슨해지는 법이 없었다고 해요. 아침 8시면 어김없이 작업실에 들어갔고, 낮 12시가 되면 작업실을 나와 점심을 먹은 뒤 저녁 6시까지 다시 작업을 하는 생활을 철저히 지켰다고 합니다.
작품4를 보세요. 유영국의 삶을 반영한 듯 줄을 맞춰 배치된 도형들과 그 안팎으로 선을 맞춰 깔끔하게 칠한 색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작품은 유영국이 78세였던 1994년에 그렸어요. 좀 더 여유롭고 느긋하게 살 법한 노년의 나이에도 그는 그림 앞에서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답니다.
이 무렵 유영국은 "요즈음 내가 그림 앞에서 느끼는 팽팽한 긴장감, 그 속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새로운 각오와 열의를 배운다.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긴장의 끈을 바싹 나의 내면에 동여매고 작업에 임할 것이다"고 다짐했다고 해요. 그래서일까요. 그가 그린 산들은 변하지 않는 강건함과 강렬한 변화의 에너지를 동시에 품고 있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