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카스트로가 부른 미·소 갈등, 핵전쟁 직전까지 갔어요

입력 : 2016.12.08 03:11

[신문은 선생님]

사회주의 정권 세운 카스트로, 미국에 맞서기 위해 소련과 밀착
소련,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 진행
미국, 쿠바 봉쇄하고 중단 요구… 전쟁 직전 극적으로 합의 이뤘죠

지난달 25일 피델 카스트로(1926~2016)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사망했어요. 반세기가량 쿠바를 지배한 카스트로는 1958년 쿠바혁명으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이후 이웃 나라이자 자본주의 진영을 대변해온 미국과 끊임없는 갈등을 벌였어요. 1962년에는 카스트로가 미국에 맞서기 위해 공산주의 진영의 종주국인 소련을 끌어들이면서 미·소 양국이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는 핵전쟁 직전까지 갔었던 아찔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쿠바혁명과 미국과의 대립

쿠바 올긴(Holguin) 주에서 태어난 카스트로는 1945년 아바나대학교 법학과에 다니면서 사회주의혁명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어요. 대학을 졸업한 후 변호사가 된 카스트로는 당시 쿠바를 장악하고 있던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답니다. 1953년에는 혁명 동지 150여 명과 함께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 실패해 15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요.

1955년 특사로 풀려난 뒤 멕시코로 망명한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와 만나 의기투합하고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답니다. 군사조직을 꾸려 1956년 쿠바에 침투한 카스트로는 쿠바 내 혁명 세력을 모으고 게릴라 전술을 펼쳐 1958년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렸어요. 이를 쿠바혁명이라고 하지요.

1963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피델 카스트로가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와 손을 잡은 모습이에요.
1963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피델 카스트로가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와 손을 잡은 모습이에요. /AFP 연합뉴스

쿠바의 1인자가 된 카스트로는 강력한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사회주의적 개혁을 추진하면서 이웃 나라인 미국과 대립하게 되었어요. 카스트로가 쿠바에 있던 미국인 소유 기업과 은행들을 모두 국유화하자 미국이 쿠바와의 외교를 단절하고 강력한 경제 제재 조치를 내린 것이죠.

미국의 경제 제재로 위기에 처한 카스트로는 당시 미국과 대립하던 공산주의 진영의 종주국 소련과 손을 잡았어요. 미국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쿠바의 영향력을 갖길 원했던 소련은 경제 위기에 놓인 쿠바에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요.

◇핵전쟁 직전까지 치달은 '미사일 위기'

아바나 위치 지도

1961년 피그만 침공 사건 이후 카스트로는 공산주의자와 친소련 인사들을 중용하면서 소련의 신임을 얻어갔어요. 소련의 강력한 군사력을 이용해 미국을 위협하기 위한 것이었죠.

그 결과 쿠바와 소련은 군사조약을 체결하고 '남미에 있는 사회주의국가를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기로 했답니다.

이 소식은 1962년 10월 항공사진을 통해 미국 백악관과 펜타곤에 전달되었어요. 미군 정찰기가 소련이 비밀리에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죠.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존 F. 케네디는 적국인 소련의 미사일 기지가 미국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쿠바에 세워지는 걸 용납할 수 없었어요.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은 소련이 미사일 기지 공사를 감행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도 불사하겠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답니다. 그리고 미국의 항공모함과 전함을 동원해 쿠바의 모든 항구를 봉쇄하고 소련의 물자와 미사일이 쿠바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완전히 가로막았어요.

하지만 소련은 이러한 봉쇄 조치를 비판하며 핵 잠수함이 호위하는 미사일 운반선을 계속해서 쿠바로 몰았어요. 미사일 기지 건설 사업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고요.

이 가운데 카스트로는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는 즉시 미국을 향해 핵 공격을 해 달라"며 갈등을 부추겼고, 미국의 정찰기가 소련에 의해 격추당하고 소련의 잠수함이 미군의 공격을 받는 일도 벌어졌답니다. 미·소 간 갈등은 언제 전쟁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까지 치달은 것이죠.

당시 미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가 "회의를 끝내고 백악관을 나오면서 노을이 드리운 가을 하늘을 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음 주 토요일이 오기 전에 다 죽을 것이라는 예감에 공포에 휩싸였다"고 말할 정도였답니다.

당시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치열한 군비 경쟁으로 미국과 소련은 엄청난 양의 핵무기를 갖고 있었어요. 실제로 두 나라가 전쟁을 벌였다면 양측이 사용한 핵무기로 인해 인류 전체가 멸망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을 겁니다.

카스트로와 미국의 갈등에서 시작된 쿠바 미사일 위기는 다행히 미·소 간 전쟁이 가져올 위험을 알았던 케네디 대통령과 소련의 지도자 흐루쇼프의 합의를 통해 해결되었어요. 미국은 쿠바의 해상봉쇄를 풀고 향후 쿠바를 침공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소련은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포기하기로 한 것이죠.

소련이 미사일 기지를 폐쇄하고 미국이 이 과정을 감시하는 것도 허용하자 카스트로는 이런 소련의 조치에 강하게 항의했다고 해요. 하지만 카스트로도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두 나라의 합의를 바꿀 수 없었답니다.

☞피그만 침공 사건

쿠바혁명 이후 카스트로의 주도 하에 쿠바가 공산주의 독재국가로 변한 것에 위기감을 느낀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카스트로의 독재를 피해 미국에 망명한 쿠바인 1500명을 무장시켜 쿠바 피그만을 침공하게 했어요.

이들은 미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아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도 쿠바군과의 전투에서 완패를 당했어요. 단 3일 만에 100여 명이 죽거나 다치고 1000여 명이 쿠바군에 생포되었답니다.

미국은 포로 1000여 명을 다시 미국에 데려오기 위해 몸값 수천만달러를 카스트로 정권에 지불해야 했어요. 이 사건은 쿠바가 소련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도 되었지요.





 

김승호 인천포스코고 역사 담당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