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12년간 '스파이' 누명… 지식인의 양심이 진실 밝히다

입력 : 2016.12.01 03:09

[드레퓌스 사건]

약촌오거리 사건 무죄 인정된 최씨, 강압 수사로 10년간 억울하게 수감
유대인 육군 장교 드레퓌스, 기밀 유출 누명 써 악마섬으로 유배
에밀 졸라가 사건의 진실 글로 알려 12년 만에 무죄 판결 받았대요

지난 2000년 8월 전북 익산시 약촌오거리에서 택시 기사가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어요. 경찰은 근처 다방에서 일하던 16세 소년 최모군을 범인으로 체포했어요. 사실 진범은 따로 있었지만, 경찰은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고 최군을 범인으로 단정했어요. 최군은 재판에서 경찰의 강압 수사를 폭로하며 범행을 부인했지만 유죄 판결을 받았고, 억울하게 10년간 교도소에 수감되었어요. 그 와중에 진범이 붙잡혔지만 검찰이 진범을 인정하지 않는 황당한 일도 벌어졌답니다.

교도소를 나온 최씨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재심(再審·판결이 확정되었으나 중대한 잘못이 발견되어 다시 재판을 함)을 신청하면서 뒤늦게 최씨의 무죄가 입증되었어요. 경찰과 검찰, 법원이 최씨에게 뒤늦은 사과를 하였지만 교도소에서 흘러간 최씨의 유년 시절을 돌이킬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지금부터 120여 년 전 프랑스에서도 정부와 군 당국이 각자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던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어요. 바로 '드레퓌스 사건'입니다.

◇누명을 쓰고 '악마섬'에 유배되다

기아나 위치 지도

1894년 프랑스 군 당국은 '독일을 위한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한 육군 장교를 체포하였어요. 장교의 이름은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1859~1935). 군 당국은 배달된 기밀문서의 필체가 드레퓌스 대위의 필체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그를 범인으로 지목했어요. 당시 많은 프랑스 국민은 '드레퓌스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국가를 배반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믿었지요.

드레퓌스는 재판에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그의 주장은 모두 무시되었어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군인 자격을 박탈당한 드레퓌스는 프랑스령 기아나에 있는 '악마섬'으로 유배되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2년 뒤 다른 간첩 사건을 조사하던 피카르 중령이 기밀문서를 독일 대사관에 보낸 사람은 드레퓌스가 아닌 에스테라지 소령이었다는 걸 밝혀냈어요. 기밀문서의 필체가 에스테라지의 필체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죠. 피카르는 이를 상부에 알리고 드레퓌스 사건을 바로잡자고 했어요.

하지만 프랑스 군 당국은 피카르를 해외로 파견해 그의 입을 막아버렸어요. 드레퓌스를 진범으로 몰아세운 재판 결과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엄청난 파장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것이죠.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알프레드 드레퓌스, 에밀 졸라
알프레드 드레퓌스, 에밀 졸라

하지만 피카르는 이런 부당한 처사에도 굴하지 않았어요. 해외 파견을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드레퓌스가 진범이 아니라는 걸 친구들에게 알렸고, 이런 사실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드레퓌스 사건을 재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답니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 사람들은 에스테라지를 진범으로 고소했지만, 놀랍게도 군사 법원은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했어요.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군사 법원의 비양심적인 판결이었지요. 오히려 피카르가 군사 기밀을 누출했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졌답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프랑스 군 당국의 부당한 태도에 분노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1898년 1월 13일, 소설가 에밀 졸라가 '로로르(L'Aurore·여명)'라는 작은 신문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드레퓌스의 무죄를 알리는 글을 실었어요. 사건의 진실을 담은 졸라의 글은 프랑스 전역에 큰 파장을 가져왔고, 반반으로 나뉘던 여론은 프랑스 정부를 비난하는 쪽으로 바뀌었답니다.

하지만 이 일로 졸라는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았고, 프랑스 정부의 탄압을 받았어요. 프랑스 정부의 고소로 재판에서 1년 징역형을 받은 졸라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 뒤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어요.

◇12년 만에 누명을 벗다

졸라의 글로 여론의 비난이 계속되자 프랑스 군 당국은 결국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재심을 열기로 했어요. 에스테라지 소령도 "기밀문서는 내가 작성한 것"이라고 인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드레퓌스의 무죄가 밝혀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프랑스 군사 법원은 또다시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했어요. 그리고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인정하면 사면(赦免·죄를 용서하여 형벌을 면제해주는 것)을 해주겠다"고 제안했지요. 유죄 판결을 유지해 군사 법원의 책임을 피하기 위한 꼼수를 부린 거예요. 오랜 재판에 지친 드레퓌스는 주변의 만류에도 결국 사면 제안을 수용했답니다.

12년간 ‘독일 스파이’라는 누명을 썼던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사진 가운데 뒤돌아서 있는 사람)가 1906년 7월 프랑스 최고 재판소의 법정에 참석한 모습이에요.
12년간 ‘독일 스파이’라는 누명을 썼던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사진 가운데 뒤돌아서 있는 사람)가 1906년 7월 프랑스 최고 재판소의 법정에 참석한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

하지만 이후에도 "드레퓌스가 무죄라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는 드레퓌스파의 주장과 노력은 계속되었어요. 결국 드레퓌스는 사면을 반납하고 명예 회복을 위한 재심을 요구했지요. 1906년, 프랑스 최고 재판소는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한 것은 오류였다"는 판결을 내렸어요. 지식인으로서 양심에 충실했던 졸라와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드레퓌스는 12년 만에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정부와 군사 법원의 비양심적인 태도가 가장 큰 원인이었어요. 당시 프랑스와 유럽 사회에 만연하던 반유대주의도 유대인인 드레퓌스를 배신자로 섣불리 단정한 원인이 되었고요.

하지만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과 드레퓌스 사건의 결말에서 나타나듯 결국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랍니다. 졸라의 글 '나는 고발한다'는 이런 문장으로 끝을 맺어요. "그대 안에서 진실과 정의는 어김없이 잠 깨는 새벽을 맞을 것이며, 언제나 영웅적으로 떨쳐 일어날 것이다."

 

윤형덕 하늘고 역사 담당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