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中 공산당 정권 수립의 '영웅'… 문화대혁명 큰 오점
[마오쩌둥]
최근 '핵심' 지위 받은 시진핑 "제2의 마오쩌둥 아니냐" 논란
마오, 대장정 후 공산당 이끌어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
대약진운동 실패로 수천만명 희생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가 지난달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핵심' 지위를 부여받았어요. 집단지도체제를 표방하는 중국 공산당이 주석에게 '핵심'이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건 14년 만의 일이랍니다. 그래서 "시진핑 주석이 장기 집권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전망과 "시진핑이 제2의 마오쩌둥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어요.
오늘은 시진핑에 앞서 중국 공산당을 이끌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해 '핵심' 지위를 처음으로 부여받았던 마오쩌둥(1893~1976)에 대해 알아보도록 해요.
◇대장정을 거쳐 '중공'을 수립하다
마오쩌둥은 중국 후난성 창사 인근의 한 마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어릴 때부터 지독한 책벌레였던 마오쩌둥은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공산주의에 매혹되었고, 1920년부터 창사 일대에서 중국 공산당원으로 활동하게 되었어요.
이후 장제스가 이끌던 국민당과 대립하던 공산당은 1934년 국민당 군대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궤멸 위기에 놓였어요. 이때 마오쩌둥은 공산당을 이끌고 국민당 군대의 포위망을 탈출한 뒤 1여 년간 무려 1만2500㎞를 이동하는 '대장정'에 오르게 됩니다. 마오쩌둥과 공산당원들은 하루에 40㎞ 이상 쉬지 않고 행군해 산맥 18개와 강 17개를 넘어 국민당 군대의 추격을 따돌리고 산시성 옌안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했어요.
대장정을 이끌고 공산당을 재정비하며 공산당의 지도자가 된 마오쩌둥은 '일본의 침략을 물리친다'는 명분으로 국민당과 잠시 손을 잡는 '국공합작'을 벌였지만,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다시 국민당과 치열한 내전을 벌였어요. 마오쩌둥은 대장정 때 포섭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내전에서 승리했고, 1949년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며 중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어요.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마오쩌둥은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실험을 시작했어요. 공장 등 모든 산업 시설은 물론, 토지와 농기구까지 국가 소유가 되었어요. 농민들이 공공 토지에서 공동으로 일하고 수확물을 똑같이 나누어 가지는 집단농장도 운영되었고요.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이런 공산주의 경제 방식은 비효율과 부패만 가져왔답니다. 위기감을 느낀 마오쩌둥이 "중국을 산업화된 강대국으로 만들겠다"며 대약진운동을 시작했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어요. 마오쩌둥의 한마디에 경제가 휘청거렸고 애꿎은 참새들이 비명횡사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 ▲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중국 베이징 톈안먼 앞에서 중국 공안들이 줄을 맞추어 행진하는 모습이에요. /AP
어느 날 논밭의 벼를 쪼아먹는 참새를 쫓는 농민을 본 마오쩌둥이 참새를 가리키며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고 말하자 중국 전역에서 참새 박멸 운동이 일어난 것이죠. 그 결과 참새의 수가 급격히 줄면서 해충이 번성했고, 오히려 전보다 농작물 피해가 더 커졌답니다. 여기에 1960년부터 대기근이 일어나면서 급기야 수천만 명이 굶어 죽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마오쩌둥은 주석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어요.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다
한동안 숨죽이던 마오쩌둥은 1966년 전후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 자신을 비판했던 공산당 지도자들을 "농민을 착취하는 지주와 자본주의를 중국에 끌어들이고 있다"고 공격하며 대중을 선동하고 나섰어요. 동시에 유교적 전통과 지주·부르주아·자본가 계급을 아예 말살시키는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답니다.
문화대혁명을 바탕으로 마오쩌둥은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다시 주석이 되었어요. 마오쩌둥을 지지하는 공산당원은 물론 평범한 학생들도 마오쩌둥의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홍위병'이 되어 유교 문화재를 파괴하고 죄 없는 사람을 '공산당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몰아 마구 죽이는 끔찍한 일들도 벌어졌고요.
마오쩌둥이 죽은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이 계속되면서 중국에서는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감옥에 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어요. 중국은 혼돈 상태에 빠졌고, 경제 상황은 전보다 더 악화되었지요. 중국은 마오쩌둥이 죽고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비로소 사회적 안정과 경제를 회복할 수 있었답니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중국을 이끈 덩샤오핑은 극단적인 공산주의를 추구했던 마오쩌둥과 달리 실용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했어요. 그의 경제 정책을 일명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라고 부릅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는 뜻으로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중국 인민을 잘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경제정책"이라는 덩샤오핑의 말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이에 따라 덩샤오핑은 1970년대 말부터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고 외국과의 교류·교역을 늘리는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어요. 그 결과 중국은 정치는 공산당이 통제하면서도 경제는 시장 체제로 운영되는 독특한 나라가 되었지요. 1990년 전후로 공산주의 경제를 고집하던 소련과 여러 공산권 국가가 무너질 때에도 중국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