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 부른 수도승의 정체는…
[그리고리 라스푸틴]
황태자의 병 고쳐 황실 신임 얻어 황후 조종해 장관들 수시로 바꾸고
황제에게 군사 작전 지시하기도
차르 측근이 뒤늦게 암살했지만 혁명 일어나 제국 무너졌어요
- ▲ 라스푸틴을 총애했던 황후 알렉산드라와 차르 니콜라이 2세. /위키피디아
온 나라가 '비선(秘線·몰래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 또는 단체) 실세' 논란으로 떠들썩한 가운데 '비선 실세'를 상징하는 역사적 인물로 라스푸틴이 자주 거론되고 있어요. 오늘은 근대 러시아 역사를 흔들었던 요승(妖僧·말이나 행동이 정상을 벗어나 세상을 어지럽히는 승려) 그리고리 라스푸틴(1872?~1916)에 대해 알아보도록 해요.
◇황태자의 병을 고친 떠돌이 수도승
19세기 중반 시베리아에 사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라스푸틴의 본명은 그리고리 예피모비치예요. 수도원을 떠도는 수도승 생활을 하며 농민들의 환심을 사 유명세를 탄 라스푸틴은 "내가 기도를 하면 황태자 알렉세이의 혈우병(조그만 상처에도 쉽게 피가 나고 피가 잘 멎지 않는 병)을 치료할 수 있다"며 차르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에게 접근했답니다.
라스푸틴이 어떤 방법을 썼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라스푸틴이 기도를 하면서 의사들도 어찌 하지 못하던 황태자의 병세가 호전되었다고 해요. 라스푸틴은 "황후의 친구인 안나 비루보바가 사고를 당할 것이다. 살아나긴 하지만 장애가 남을 것"이라는 예언을 했는데, 실제로 이 예언이 정확히 들어맞었다고 합니다.
이를 계기로 황후와 차르는 '라스푸틴은 실제로 하늘이 내려준 성스러운 사람'이라고 믿게 되었어요. 심지어 황후는 라스푸틴에게 "나의 스승인 당신이 내 곁에 있고, 내가 당신의 손에 키스하고, 내 머리를 당신의 성스러운 어깨에 기댈 때 비로소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습니다"라는 편지를 적어 보내기도 했답니다.
라스푸틴은 황실의 총애를 얻게 되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황후와 가까이 지내던 귀족 부인들은 물론 수녀와 여러 여인을 희롱하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죠. 교회 지도자와 여러 사람이 라스푸틴을 고발하면서 이 사실이 드러났고, 라스푸틴도 자신의 죄를 인정했어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고위 경찰을 비롯해 라스푸틴을 처벌하려는 관리들이 모조리 해임되는 일이 연이어 벌어졌어요. 라스푸틴을 총애한 황후가 그를 처벌하지 못하게 가로막은 것이지요.
이런 상황을 걱정한 러시아 수상 스톨리핀은 라스푸틴이 요사스럽고 수상한 인물이라고 차르에게 보고했지만, 니콜라이 2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경이 한 말은 모두 진실일 것이오. 그러나 라스푸틴에 관해서는 다시는 나에게 말하지 말 것을 부탁해야겠소. 여하간 나는 그것에 관해서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소."
◇황후를 앞세워 국정을 주무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차르는 황궁의 일을 황후에게 맡기고 직접 전쟁터에 나가 군대를 지휘했어요. 이 틈에 라스푸틴은 황후를 마음대로 조종하며 러시아 정부의 모든 실권을 장악했답니다.
심지어 "꿈에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전쟁터에 나가 있는 차르에게 '군사 명령'을 전하기도 했어요. 차르는 전쟁이나 전략은 전혀 모르는 라스푸틴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고, 그 결과 전쟁 상황은 러시아에 점점 더 불리해지기만 했어요.
- ▲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가운데)이 러시아 제국의 고위 군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에요. 라스푸틴은 황후의 총애를 이용해 러시아 국정을 혼란에 빠트려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을 초래했어요. /Getty Images 이매진스
차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러시아의 국정(國政·나라의 정치)도 엉망이 되었어요. 라스푸틴이 황후를 조종해 며칠 간격으로 장관들을 바꾼 탓에 내각이 해산되는 일이 반복됐기 때문이죠. 라스푸틴이 보리스 슈튀르머라는 어리숙한 인물을 수상으로 임명하자 러시아에 머물던 프랑스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슈튀르머는 무능하고 지시를 잘 따르기 때문에 수상에 임명된 거다. … 라스푸틴이 황제에게 그를 극진히 천거한 것이 틀림없다."
◇라스푸틴의 죽음과 제정 러시아의 멸망
국정 혼란이 계속되면서 차르와 황후는 민심을 완전히 잃고 말았어요. 급기야 차르를 따르던 귀족 사이에서도 차르를 몰아내고 다른 사람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답니다.
위기감을 느낀 차르의 측근들은 차르의 조카사위였던 펠릭스 유스포프 대공을 앞세워 라스푸틴을 제거하기로 결심했어요. 라스푸틴이 죽고 나면 차르와 황후가 정신을 차리고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것이라 생각한 것이죠. 1916년 12월, 유스포프 대공과 차르의 측근들은 라스푸틴을 식사 자리에 초대한 뒤 그를 암살하였어요.
하지만 라스푸틴을 죽여 민심을 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요. 다음 해 3월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과 봉기를 시작으로 공산당의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제정 러시아와 로마노프 왕조는 멸망하고 말았어요.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차르와 황후, 그리고 그 가족은 모두 처형당했고요. 라스푸틴의 전횡으로 멸망에 이른 제정 러시아의 이야기는 비선 실세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남아 있답니다.
☞러시아 황제 칭호 '차르(tsar)'
차르는 ‘황제’를 뜻하는 라틴어 'kaiser'에서 유래한 말로 러시아를 비롯해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등 슬라브족 국가의 '군주'를 의미하는 단어예요.
러시아에서는 1547년 이반 4세가 '차르'를 러시아 황제의 정식 칭호로 정했고, 그 이후 러시아 황제를 '차르'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대대적인 서구식 개혁으로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끈 로마노프 왕조의 표트르 대제(표트르 1세)는 1721년 '모든 러시아의 황제'라는 뜻의 '임페라토르'라는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답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차르라는 칭호를 함께 사용하고,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하기 전까지도 차르는 계속해서 러시아 황제의 칭호로 사용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