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18번의 쿠데타에도… 태국 안정시킨 왕

입력 : 2016.10.20 03:10

[태국 푸미폰 국왕 서거]

독립 지켰던 짜끄리 왕조의 9대 왕… 왕실 재산으로 태국 국민 삶 개선
푸미폰 국왕의 증조부 몽꿋 국왕, 영화 '왕과 나' 주인공으로 그려져
왕세자 와치랄롱꼰, 10대 왕 된대요

1950년대에 영화와 뮤지컬로 제작된 '왕과 나'는 시암 왕국의 왕 몽구트와 영국인 가정교사 애나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특히 애나가 맨발로 왕과 함께 춤추는 장면은 명장면으로 꼽히지요. 많은 사람이 몽구트를 서양의 왕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시암은 태국의 옛 이름이고 몽구트는 지난 13일(현지 시각) 서거한 태국의 국왕 푸미폰 아둔야뎃(88·라마 9세)의 증조부 몽꿋(라마 4세) 국왕입니다. 참고로 몽구트와 가정교사 애나의 사랑 이야기는 순전히 허구랍니다.

푸미폰 국왕의 죽음으로 태국은 깊은 슬픔에 빠져 있어요. 태국 짜끄리 왕조의 아홉 번째 왕으로 70년간 국왕 자리를 지킨 푸미폰 국왕은 태국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그가 죽기 전 병에 걸렸다는 소식에 "국왕 대신 내가 죽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태국 국민도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태국의 독립을 지킨 짜끄리 왕조

푸미폰 국왕이 태국 국민의 지지를 받은 배경에는 나라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짜끄리 왕조의 역사가 있어요. 18~19세기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가 서유럽 강대국의 식민지배를 받았지만, 태국은 드물게도 식민지배를 받지 않았답니다. 짜끄리 왕조의 국왕들이 현명한 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죠.

태국 국민의 조상인 타이 민족은 13세기 무렵 수코타이 왕조라는 첫 독립 왕국을 세웠지만 15세기에 멸망하고 말았어요. 그 뒤를 이어 아유타야 왕조가 수립되었지만 아유타야 왕조도 18세기 중엽 버마(오늘날 미얀마)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고요. 이때 프라야 짜끄리라는 장군이 타이족을 이끌고 방콕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왕조를 세웠는데, 이게 바로 짜끄리 왕조입니다.

영화 '왕과 나'의 주인공이자 짜끄리 왕조의 네 번째 왕인 몽꿋 국왕이 즉위한 19세기 중엽 태국은 식민지배를 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어요. 인도차이나반도를 점령한 프랑스와 인도와 버마를 굴복시킨 영국이 동·서 양쪽에서 태국을 압박했기 때문이었죠.

이때 몽꿋 국왕과 그의 뒤를 이은 쭐랄롱꼰(라마 5세) 국왕은 '일부 영토와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나라의 독립을 지키겠다'는 결단을 내렸어요. 몽꿋 국왕은 강대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받아들였고, 쭐랄롱꼰 국왕은 영국과 프랑스에 태국이 지배하던 땅 일부를 넘겨주었어요.

이로써 태국은 갖고 있던 영토의 절반을 잃었지만, 대신 프랑스와 영국을 중재하는 국가로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답니다.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읽은 두 국왕의 판단이 태국의 독립을 지킨 것이지요.

◇쿠데타를 도와 '국왕개발계획' 시작하다

푸미폰 국왕은 8대 왕이자 자신의 형인 아난타 국왕이 의문의 총격으로 사망하면서 왕위를 물려받았어요. 당시 태국은 정치적으로 크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답니다. 1932년 법학자와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태국을 입헌군주제 국가로 바꾸었지만, 그 이후 피분송크람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인 세력(군부)의 독재정치가 이어지고 있었지요.

지난 13일(현지 시각) 서거한 태국 푸미폰(왼쪽 사진) 국왕은 1992년 ‘검은 5월’ 사건 등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어요.
지난 13일(현지 시각) 서거한 태국 푸미폰(왼쪽 사진) 국왕은 1992년 ‘검은 5월’ 사건 등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어요. /뉴시스·AFP

푸미폰 국왕은 무너진 태국 왕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1957년 사릿 타나랏 장군의 쿠데타를 지원했어요. 이로써 태국 정부의 실권은 타나랏 장군에게 넘어갔고, 푸미폰 국왕은 쿠데타를 지원한 대가로 여러 권한과 막대한 돈을 받았어요.

이를 바탕으로 푸미폰 국왕은 낙후된 농촌을 개발하고 의료단을 보내는 한편, 수력발전소를 짓고 농업기술을 발전시키는 데에 왕실의 돈을 아끼지 않았어요. 덕분에 푸미폰 국왕은 태국 국민의 지지를 얻게 되었지요.

◇푸미폰 국왕에 대한 엇갈린 평가

푸미폰 국왕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혼란스러운 태국의 정치 상황을 안정시킨 것입니다. 1932년 이후 약 60년간 태국에서는 쿠데타가 무려 18번이 일어났는데, 이때마다 푸미폰 국왕은 정치 세력 간의 갈등을 안정시켜 태국 국민의 지지를 받게 되었어요.

특히 '검은 5월' 사건 때 푸미폰 국왕은 태국 국민과 전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답니다. 검은 5월 사건은 1992년 수찐다 끄라쁘라윤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이 시위를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한 일이에요.

이때 푸미폰 국왕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수찐다 장군과 야당 대표였던 짬롱을 불러들였는데, 국왕 앞에 무릎을 꿇은 수찐다와 짬롱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국왕의 권위가 크게 높아졌어요. 이후 푸미폰 국왕의 지지를 받지 못한 수찐다는 외국으로 도망가야 했고, 태국에는 민주 정부가 수립되었지요.

하지만 "푸미폰 국왕이 자신의 권력을 키우기 위해 쿠데타를 이용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아요. 입헌군주제의 취지와 달리 푸미폰 국왕은 쿠데타를 동의하거나 거부하면서 태국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죠.

서거한 푸미폰 국왕의 뒤를 이을 왕세자 와치랄롱꼰(64)은 아버지와 달리 거듭된 이혼과 기이한 행동 탓에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최근에도 정치 세력 간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푸미폰 국왕을 잃은 태국은 과연 어떤 운명을 마주하게 될까요?

☞입헌군주제

입헌군주제는 의회에서 만든 헌법이 국왕의 힘을 제한하는 정치체제를 말해요. 대부분의 입헌군주제 국가에서는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만든 헌법을 통해 왕이 정치에 전혀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어요. 대신 시민들이 헌법에 따라 의회와 정부의 대표를 뽑아 나라를 다스려요. 그래서 입헌군주제 국가의 왕들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되곤 합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있는 영국을 비롯해 일본, 스페인 등이 대표적인 입헌군주제 국가예요.



 

윤형덕 하늘고 역사 담당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