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노벨상 품은 콜롬비아 평화도 품을까
입력 : 2016.10.12 10:23
[콜롬비아 내전]
보수·자유파 충돌한 '천일전쟁' 등 독립 선언 후 정치적 갈등 계속
1964년 무장단체 FARC 등장…테러·학살로 현대사에 비극 남겨
반군과 평화협정 산체스 대통령…올해 노벨평화상 수상했어요
지난 7일(현지 시각) 노벨상 수상자를 결정하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올해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후안 마누엘 산토스(65) 콜롬비아 대통령을 선정했어요. 산토스 대통령은 무려 52년간 지속된 콜롬비아 정부군과 반군 세력인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 간의 내전을 끝내기 위한 평화협정을 체결한 공로를 인정받은 거예요. 16세기부터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콜롬비아는 1810년 독립을 선언한 후 극심한 정치적 갈등으로 인한 내전과 폭력 사태를 겪었어요. 콜롬비아 정부와 FARC 간의 내전도 그 연장선에 놓여있답니다.
- ▲ 지난달 26일 후안 마누엘 산토스(왼쪽) 콜롬비아 대통령과 FARC의 수장 티모첸코(오른쪽)가 평화협정을 체결한 뒤 악수하고 있어요./연합뉴스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공격한 틈을 타 독립을 선언한 콜롬비아는 '남미 독립의 아버지' 시몬 볼리바르에 의해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 파나마가 통합된 '대콜롬비아연방(그란콜롬비아)'으로 거듭났어요. 하지만 1930년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가 독립하면서 대콜롬비아연방은 '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으로 축소되었어요.
1886년 '콜롬비아 공화국'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었지만, 건국 이후 계속된 보수파와 자유파 간의 정치적 갈등은 멈출 줄 몰랐어요. 보수파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진 가톨릭 성직자와 대토지 소유자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정부에 많은 권한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반면 자유파는 성직자의 특권과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요.
두 세력의 정치적 갈등은 결국 의회를 넘어 전쟁으로 번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총 1130일 동안 이어진 '천일전쟁'(1899~1902)입니다. 이 전쟁은 신식 무기를 갖춘 보수파의 정부군이 구식 무기밖에 없던 자유파 군대를 진압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어요. 자유파는 파나마 지역을 점령해 전세를 뒤집으려 했지만, 보수파는 파나마에 주둔하던 미 해병대의 도움을 받아 자유파의 공격을 막아냈어요.
미국의 개입에 위협을 느낀 자유파가 보수파와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이 전쟁은 막을 내렸어요. 이 전쟁으로 1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경제는 완전히 파탄 상태에 놓였지요. 1903년에는 파나마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파나마운하의 소유권도 잃고 말았어요.
보수파와 자유파는 1948년 '보고타 사태'를 계기로 재차 무력 충돌을 벌였어요. 자유파의 지도자 호르헤 가이탄이 암살당하자 분노한 자유파 세력이 수도 보고타에서 폭동을 일으킨 거예요. 보고타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과 교회가 파괴되고 이틀 동안 2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어요. '보고타 사태'는 곧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자유파의 게릴라 군대와 정부군 간의 충돌로 이어졌어요. '라 비올렌시아(La Violencia·스페인어로 '폭력')'라 부르는 10여 년간의 내전으로 약 2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 ▲ 1948년 사태 때 폭동이 일어난 보고타 시내 모습이에요./AP·연합뉴스
라 비올렌시아에 이어 군부의 쿠데타로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보수파와 자유파는 1958년 국민전선을 구축하기로 합의해요. 두 정당이 의회를 장악하되 4년마다 반드시 서로 정권을 교체하기로 한 것이죠.
그러자 자유파 내의 급진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두 정당만 정권을 잡는 체제는 수용할 수 없다'며 무장투쟁에 나서게 됩니다. 여러 무장단체 중 1964년 콜롬비아 공산당의 무력조직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FARC예요.
당시 콜롬비아 농민들은 커피 가격의 불안정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도시에 사는 시민들도 실업 문제와 높은 물가로 고통받고 있었어요. 하지만 보수파와 자유파는 이런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권력투쟁에만 몰두했어요. 그사이 공산주의 세력이 농민과 근로자들을 끌어들이면서 FARC라는 과격한 반군조직으로 성장한 거예요.
FARC의 등장은 콜롬비아 현대사에 또 다른 비극을 남겼어요. 계속된 정부군과 FARC의 전투, 연이은 FARC의 테러와 민간인 학살로 지난 52년간 최소 22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난민 800만명이 발생했어요. 1993년 공산당과 연대를 끊은 FARC는 이후 마약 사업, 민간인 납치 같은 전쟁범죄도 저질렀어요.
지난달 산토스 대통령과 FARC의 수장 티모첸코가 맺은 평화협정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된 것도 '내전을 빨리 끝내자'는 여론보다 'FARC의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 평화협정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목소리가 조금 더 높기 때문이에요. 산토스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은 '여론을 설득해 평화협정을 잘 마무리하라'는 국제사회의 격려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과연 콜롬비아는 근대부터 이어진 내전의 비극을 이번에 끝낼 수 있을까요?
커피 산업 의존도 놓아 수출 나빠지면 정치적 갈등까지
콜롬비아는 브라질·베트남·케냐 등과 함께 세계적인 커피 생산국으로 꼽혀요. 콜롬비아는 1870년대부터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남부 지역을 개발하고 이곳에 대규모의 커피 농장을 만들었답니다. 1890년대부터는 미국에 커피를 수출하기 시작한 콜롬비아는 1900년대 들어서는 국제 커피 시장의 수요를 충분히 감당할 정도로 커피 재배의 중심지로 발전했어요. 얼마나 커피를 많이 팔았던지 커피로 벌어들인 돈으로 통신망을 구축하고 댐을 짓는 공공사업을 벌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커피 산업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커피의 수출 가격이 내려가면 콜롬비아의 경제도 덩달아 어려워지는 문제도 나타났어요. 1930년대에는 커피의 수출 가격이 갑자기 내려가면서 콜롬비아 산업 전체가 마비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합니다.
커피로 벌어진 경제난은 농민과 근로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았고, 수입품이 줄어들면서 물가는 높아졌어요. 불만에 찬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자 정치적 갈등도 덩달아 커졌어요. 1·2차 세계대전 등으로 커피 수출이 부진할 때마다 콜롬비아에선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경제·사회 정책을 놓고 보수파와 자유파 간의 극심한 갈등이 벌어졌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