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영국, 바다 지배한 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입력 : 2016.09.29 03:09
[국가 운명 바꾼 해운]
해군·해운업 키운 엘리자베스 1세
무적함대와 겨룬 칼레 해전서 승리… 이후 지중해·대서양 해상 장악
향신료 무역 주도, 막대한 부 쌓아
서양보다 항해 기술 앞섰던 명나라
세력 다툼·왜구 침략으로 해운 포기… 국력 약해지는 원인 되기도 했어요
최근 한진해운이라는 해운(海運·배로 사람이나 물건을 날라 전달하는 '해상 운송'을 줄여서 부르는 말) 회사가 심각한 경영난에 빠지면서 국제적인 문제가 되고 있어요. 경영난에 빠진 한진해운의 선박들이 곳곳에 압류를 당하고, 항구 이용료와 항구에서 물건을 내리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항구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다 위에 떠 있어야 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죠.
대부분 기업은 무역을 할 때 해운을 이용해요. 해운은 비교적 저렴한 돈으로 많은 물건을 한 번에 나를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해운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무역을 통해 거래되는 물건이 제때 전달되지 않는 물류난이 일어나게 됩니다. 한진해운의 배들이 바다 위에서 오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서 한진해운에 물건 운송을 맡긴 수많은 기업도 연달아 피해를 입고 있어요.
대부분 기업은 무역을 할 때 해운을 이용해요. 해운은 비교적 저렴한 돈으로 많은 물건을 한 번에 나를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해운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무역을 통해 거래되는 물건이 제때 전달되지 않는 물류난이 일어나게 됩니다. 한진해운의 배들이 바다 위에서 오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서 한진해운에 물건 운송을 맡긴 수많은 기업도 연달아 피해를 입고 있어요.
- ▲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위 사진)는 16세기 영국의 해운업과 해상 무역을 일으켜 영국 경제의 번영을 가져왔어요. 정화의 원정대가 탔던 함선을 실제 크기로 복원한 모습이에요(아래 사진). /위키피디아
◇해운을 장악한 영국, 세계를 지배하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 들어본 적 있나요? 이 말은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의 총애를 받던 월터 롤리 경이 한 말이에요.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했을 때 영국은 심각한 경제 위기에 놓여 있었어요. 엘리자베스 여왕은 롤리 경의 말처럼 바다와 해운을 장악해야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영국 해군에 많은 투자를 하였어요. 심지어 신하들의 반대도 물리치고 당대 가장 유명한 해적이었던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영국 해군의 지휘관으로 끌어들였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렇게 해군에 공을 들였던 이유는 당시 유럽 최고의 강대국인 스페인을 꺾어야만 바다와 해운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일찍이 콜럼버스를 후원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식민지를 건설한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채굴되는 막대한 은을 바탕으로 경제 대국으로 떠올랐어요. 또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무적함대(아르마다)'를 바탕으로 지중해와 대서양의 해운을 장악하고 있었답니다.
이후 지중해와 대서양의 해운을 장악한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예견대로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어요. 동인도회사를 통해 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스페인이 독점하던 향신료 무역을 주도해 막대한 부를 벌어들였어요. 이를 바탕으로 해군력과 해운업에 힘을 더한 영국은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해상 무역을 하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발전했어요.
◇서양보다 앞선 정화의 대원정
서양 문명이 뱃길을 통해 처음 인도에 도달한 것은 1497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 최남단을 지나 인도 캘리컷에 도착한 순간이었어요. 그런데 중국에는 이보다 80~90년 앞서 인도양 항로를 발견하고 아라비아의 메카와 아프리카 케냐 해안까지 도달한 인물이 있었답니다. 바로 명나라 황실의 환관이자 탐험가인 정화(1371~1433?)예요.
"명나라의 부강함을 세계 각지에 알리고 세계의 진귀한 물건을 찾아오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은 정화는 대함대를 꾸렸어요. 정화가 이끈 원정대의 규모는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유럽의 원정대보다 훨씬 컸다고 합니다. 콜럼버스의 함대는 배 3척에 선원 120여 명으로 꾸려져 있었는데, 정화는 무려 배 62척에 승무원만 2만7800명을 태웠다고 해요. 또 정화가 탔던 함선의 크기는 콜럼버스가 탔던 산타마리아호보다 30배나 더 컸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지요? 정화는 20여 년간 총 7차례의 원정을 통해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라비아 반도와 동아프리카 해안으로 나아갔어요. 약 30여 개의 나라와 새롭게 외교 관계를 맺었고, 세계 각지의 보물은 물론 아프리카에 사는 기린까지 중국에 가져왔다고 합니다.
◇해운을 경시한 명나라의 몰락
서양보다 뛰어난 항해 기술을 자랑했던 명나라는 정화가 죽고 난 뒤 오히려 바다를 멀리하게 됩니다. 정화와 같은 환관들이 해운과 해양 원정을 통해 세력을 키우는 것을 두려워한 문신들이 견제에 나선 것이죠. 해양 원정은 완전히 중단되었고, 정화의 함선들은 모두 분해되어 버려졌어요. 정화의 원정대가 쓴 항해일지와 보고서도 모두 불태워 없어졌답니다. 급기야 명나라는 '왜구들이 바다와 해안가에서 약탈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조공 무역 외에 모든 해상 무역을 금지시키는 해금령(海禁令)을 내렸어요. 정화의 원정을 통해 세계 최고의 해운 강국이 될 수 있었던 중국은 이렇게 스스로 세계 해운의 주도권을 서양에 넘겨주고 말았답니다.
명나라가 조정 내 세력 다툼과 왜구의 침략으로 해운을 포기한 것은 이후 국력 쇠퇴의 원인이 되기도 했어요. 해상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이 사라졌고, 국제 정세에 대한 소식도 빠르게 접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해운을 중시해 세계 최강대국으로 올라선 영국과 해운을 간과해 몰락의 길을 걸은 중국 명나라의 이야기는 해운과 해상 무역이 여전히 중요한 오늘날에도 뜻깊은 교훈을 전해주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