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아하! 이 인물] 독립운동가의 아들, 중국의 '영화 황제'가 되다
입력 : 2016.08.22 03:08
배우 김염
'영화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 1위, 가장 잘생기고 멋진 남자 배우 1위, 가장 사귀고 싶은 배우 1위.' 1934년 중국 상해의 주간지 전성(電聲)이 독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투표에서 1위를 독차지했던 배우는 바로 조선 청년 김염(金焰)이에요.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잃은 국민으로 중국에 건너간 24세의 조선 청년이 당시 아시아 영화계를 선도하던 상해에서 최고의 인기 배우로 등극한 것이죠.
김염의 본명은 김덕린이에요. 불꽃을 뜻하는 염(焰)이라는 이름은 자신의 앞길이 불꽃처럼 피어오르기를 바라며 스스로에게 지어준 배우로서의 이름이랍니다.
김염은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였던 김필순의 아들이고, 김염의 고모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규식이에요. 김염은 두 살이 되던 1912년 일제의 추적을 받던 김필순이 북만주로 이주하면서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어요.
김염의 본명은 김덕린이에요. 불꽃을 뜻하는 염(焰)이라는 이름은 자신의 앞길이 불꽃처럼 피어오르기를 바라며 스스로에게 지어준 배우로서의 이름이랍니다.
김염은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였던 김필순의 아들이고, 김염의 고모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규식이에요. 김염은 두 살이 되던 1912년 일제의 추적을 받던 김필순이 북만주로 이주하면서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어요.
- ▲ 1930년대 중국에서 활약한 영화배우 김염은 당시 중국에서‘영화 황제’로 불릴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어요. /위키피디아
영화 제작사의 스태프와 단역배우를 맡으며 무명 시절을 보낸 김염이 영화배우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 건 쑨위(孫瑜) 감독을 만나게 되면서예요.
미국 컬럼비아대학과 뉴욕영화연구소를 나온 실력파 감독인 쑨위는 무명이던 김염을 '풍류검객(風流劍客)' '야초한화(野草閑花)'라는 자신의 영화에 연이어 주연으로 발탁했어요. 그 이유에 대해 쑨위는 "다른 배우에게서는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청년상을 김염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어요.
김염은 배우로서 외모와 신체 조건이 뛰어난 건 물론이고, 북경의 표준어를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알았어요. 무엇보다도 김염은 독립운동가의 후손답게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정신을 연기로 잘 표현했어요.
영화에서 김염이 보여준 일본에 대한 저항 정신은 당시 중국 청소년들과 대학생에게 큰 영향을 줬고, 당시 중국 청년들 사이에서는 김염의 대사나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 유행이었어요. 지금도 중국 언론과 영화인들은 김염을 중국 영화의 발전에 가장 중요했던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는답니다.
중국 언론들은 김염이 출연한 영화 '대로(大路)'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어요. "김염이 출연한 '대로'는 일본에 저항하려는 중국인들의 의지를 처음으로 다룬 작품으로, 1930년대 중국의 영화 수준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렸다."
김염은 단지 영화 속에서만 일본에 대한 저항 정신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어요. 일본 회사가 참여하는 영화에는 출연을 거절했고, 마구잡이식 상업영화를 만드는 것도 단호히 거부했다고 합니다. 김염이 이런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지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선 명문가의 후예라는 자부심과 '정의롭고 진취적인 자세로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청년'을 영화로 보여주려 했던 쑨위 감독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죠.
영화 '야초한화'를 계기로 중국 영화계의 스타로 등극한 김염은 이후 여러 중국 영화에 출연하며 '영화 황제'로 불리게 될 정도로 인기를 누렸어요.
김염은 데뷔 초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지만, 이후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중국 영화 팬들의 사랑은 전혀 식지 않았다고 합니다. 중국의 총리였던 주은래도 김염에게 "당신은 중국의 사위"라며 조선인 배우로서 그를 인정하고 격려했어요. 물론 지금도 수많은 중국인에게 김염은 뛰어난 재능과 훌륭한 저항 정신을 가진 '영화 황제'이자 '조선인 배우'로 기억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