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독일, 110년 만에 사과… 헤레로족의 눈물 닦을 수 있을까

입력 : 2016.07.28 03:06

[나미비아 집단 학살]

식민지 나미비아에서 '대학살'
헤레로족 6만5000명 목숨 잃고 생존자는 고문·강제 노역 당해

열강의 전쟁터 된 아프리카 대륙… 영국·프랑스, 파쇼다에서 충돌

지난 13일(현지 시각) 독일 현지 언론들은 "독일 정부가 1900년대 초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저지른 집단 학살에 대해 나미비아 정부에 공식 사죄를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어요. 20세기 최초의 대학살이라고도 부르는 나미비아 학살에 대해 독일 정부가 뒤늦게 잘못을 인정한 것이죠. 아프리카 곳곳에는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에 온갖 시달림을 당해온 수난의 역사가 숨겨져 있어요. 나미비아 학살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어요.

◇아름다운 사막의 나라 나미비아의 비극

유럽 대륙에 살던 사람들이 지중해 건너 아프리카를 알기 전까지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평온하게 살고 있었어요. 유럽 사람들은 리빙스턴, 스탠리 같은 탐험가들이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내륙을 탐험하면서 사하라사막 남쪽의 아프리카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영토를 넓히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유럽의 제국주의 나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기 위한 경쟁을 시작했답니다. 탐험가가 미지의 땅을 발견하면 총으로 무장한 군대가 뒤따라 들어와 자기네 땅으로 삼아버렸어요. 평온했던 아프리카 대륙은 유럽의 군인들과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피를 흘리는 전쟁터로 변했어요.

나미비아 헤레로족 대표 베쿠이 루코로가 독일 시민들과 함께 나미비아 학살 희생자의 묘를 찾아 참배하고 있어요.
나미비아 헤레로족 대표 베쿠이 루코로가 독일 시민들과 함께 나미비아 학살 희생자의 묘를 찾아 참배하고 있어요. /DPA·AFP
남아프리카를 두고 영국과 대립하던 독일은 베를린회의를 통해 서남아프리카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어요. 아름다운 사막으로 유명한 나미비아가 있는 지역이지요. 나미비아에는 오래전부터 헤레로족이라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고요. 독일은 1884년부터 1915년까지 이곳을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약탈을 일삼았답니다. 독일인들은 헤레로족을 '이상하고 부정적인 사람들'이라는 뜻의 '호텐토트'라고 부르며 무시했어요. 독일인들은 헤레로족을 노예처럼 부리고, 그들의 재산도 자신의 것인 양 뺏어갔어요.

나아가 독일인들은 1904년 헤레로족을 무참하게 학살했어요. 1889년 나미비아에 가축 전염병이 돌자 목축을 하며 살던 헤레로족은 당장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됐어요. 독일인들은 이런 헤레로족을 도와주기는커녕 그들의 곤경을 이용했어요. 생계가 곤란한 헤레로족이 갖고 있던 가축과 목초지를 헐값에 사들였어요. 헤레로족은 가축과 목초지를 판 돈으로 당장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가축도 땅도 없는 탓에 전보다 더 가난해졌답니다.

결국 참다못해 분노가 폭발한 헤레로족이 독일인 농장을 공격해 100여 명을 살해한 사건이 벌어져요. 이 소식을 들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로타르 폰 트로타 장군에게 1만4000여 명의 군사를 주어 나미비아로 보내요. 트로타 장군은 워터버그 전투에서 헤레로족 전사 3000명을 죽이는 것에 그치지 않았어요. 병사들을 시켜 살아남은 헤레로족 사람들을 모두 사막으로 내몰았어요. 항복은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나미비아
이렇게 6만5000명의 헤레로족 사람들이 황량한 사막에서 죽임을 당했어요. 살아남은 1만5000여 명의 사람들도 무사하지 못했어요. 이들은 독일군이 만든 강제 수용소에 갇혀 고문을 당하거나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로 강제 노동을 당했어요.

독일 정부는 최근까지도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저질렀던 전쟁범죄에 대해 거듭 사과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제는 110년 전 나미비아에서 저지른 식민지 범죄에 대해서도 사과를 하기로 했어요. 사과한다고 해서,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상처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랍니다. 하지만 잘못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한 것에서부터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시작될 수 있어요.

◇제국주의 국가 간의 충돌, 파쇼다 사건

독일 외에도 여러 제국주의 나라들은 아프리카를 두고 치열한 '땅따먹기 싸움'을 벌였어요.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파쇼다 사건'이에요. 1830년 서아프리카 알제리를 점령한 프랑스는 아프리카 동남쪽에 있는 마다가스카르 섬을 차지한 뒤 아프리카를 가로지르며 땅을 차지할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반대로 북아프리카 이집트를 차지한 영국은 남쪽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식민지로 삼은 뒤 아프리카를 세로로 잇는 철도를 놓으며 땅을 차지하려고 했답니다.

아프리카 땅을 가로지르던 프랑스와 세로로 지르던 영국은 1898년 아프리카 수단의 파쇼다라는 곳에서 마주치게 됩니다. 파쇼다는 이미 영국이 차지한 땅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프랑스 군대가 이 지역을 점령하자 영국이 반발하고 나섰어요. 전쟁 직전까지 갔던 두 나라는 프랑스가 파쇼다를 영국에 양보하는 것으로 합의했어요. 대신 영국은 프랑스가 독일을 대신해 모로코 땅을 차지할 수 있게 도와주기로 했고요. 제멋대로 선을 긋고 땅을 차지했던 유럽 제국주의의 면모를 알 수 있는 사건이었죠. 아프리카의 지도를 보면 마치 자로 그은 듯 평평한 국경선을 볼 수 있어요.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프리카 지도에 자를 대고 국경선을 그어 땅을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에요. 아프리카 나라들의 국경선에 제국주의 국가들의 잔혹한 식민지 지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죠.

공미라 세계사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