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숨어 있는 세계사] 대표적 입헌군주제 영국… 11년간 왕 없었던 적 있었죠
입력 : 2016.07.07 03:08
[왕을 몰아낸 영국의 청교도 혁명]
17세기 청교도 탄압한 찰스 1세, 의회 재판 통해 사형 당해
크롬웰의 '금욕주의' 공화정, 운동 경기 금지 등 폭정 일삼자 참지 못한 시민들이 왕 데려왔어요
최근 영국에서는 '다음번 총리가 누가 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예요. 지난달 실시된 국민투표 결과 영국이 EU를 탈퇴하는 것으로(브렉시트, Brexit) 결정 나자, 데이비드 캐머런 현 총리가 오는 10월 총리직을 사퇴하기로 했기 때문이에요. 지난 5일(현지 시각) 집권당인 영국 보수당이 다음 총리를 뽑기 위해 1차 경선을 벌인 결과 테리사 메이 내무장관이 1위를 차지했어요. 만약 메이 장관이 차기 총리에 오르게 된다면 영국은 '철의 여인'으로 불렸던 마거릿 대처(1925~2 013)에 이어 두 번째 여성 총리를 맞게 된답니다.
영국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왕이 있고, 의회의 집권당 대표인 총리가 국정을 이끌어 나가는 대표적인 '입헌군주제' 국가예요. 871년 앨프리드 대왕 이후 영국은 1100여년간 엄연히 '왕국'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과거 영국의 왕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역할을 했지만, 1688년 명예혁명 이후로는 의회가 통치권을 갖게 되면서 왕은 나라의 상징적인 존재일 따름이에요. 유럽의 스웨덴, 덴마크, 모나코, 네덜란드나 아시아의 말레이시아, 부탄, 일본도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답니다.
영국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왕이 있고, 의회의 집권당 대표인 총리가 국정을 이끌어 나가는 대표적인 '입헌군주제' 국가예요. 871년 앨프리드 대왕 이후 영국은 1100여년간 엄연히 '왕국'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과거 영국의 왕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역할을 했지만, 1688년 명예혁명 이후로는 의회가 통치권을 갖게 되면서 왕은 나라의 상징적인 존재일 따름이에요. 유럽의 스웨덴, 덴마크, 모나코, 네덜란드나 아시아의 말레이시아, 부탄, 일본도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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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년 영국 화가 앤드루 캐릭 고우가 그린‘던바 전투에서의 크롬웰’이에요. 1650년에 벌어진 던바 전투에서 크롬웰이 이끄는 철기군은 남아 있는 왕당파 세력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답니다.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
◇왕당파 vs 의회파… '잉글랜드 내전'
영국에 왕이 없었던 시기는 1649년부터 1660년까지 11년간이에요. 당시 영국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통일되기 이전이었어요.
1603년 잉글랜드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식을 낳지 않고 서거하면서 잉글랜드 왕위는 엘리자베스 1세의 친척인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1세로 넘어가게 되었어요. 제임스 1세가 스코틀랜드 왕과 잉글랜드 왕을 겸하게 된 것이죠.
잉글랜드 왕이 된 제임스 1세는 이후 잉글랜드 의회와 번번이 대립했어요. 의회파 사람들은 시민이 뽑은 의회가 국정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왕은 신이 내려주는 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을 따르는 제임스 1세가 의회를 번번이 무시했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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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리버 크롬웰(왼쪽), 찰스 1세.
결국 참다못한 잉글랜드 의회는 1628년 찰스 1세에게 '권리 청원'을 승인하라고 요구했어요. 권리 청원은 왕이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걷거나 사람을 체포할 수 없도록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어요. 의회가 세금을 배정해주지 않으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찰스 1세는 마지못해 권리 청원을 승인했지만, 대신 스코틀랜드 내 청교도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민심을 잃게 되었답니다.
결국 청교도를 중심으로 한 의회파가 1642년 찰스 1세를 지지하는 왕당파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면서 잉글랜드 내전이 시작됐어요. 의회파의 중심엔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 있었어요. 뛰어난 전략가였던 크롬웰은 철기군(Ironsides)으로 불리던 기병대를 중심으로 왕당파와의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었고, 마침내 1645년 왕당파를 잉글랜드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어요.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던 찰스 1세는 민심을 잃은 탓에 잉글랜드로 다시 추방되었고, 잉글랜드 의회는 1949년 1월 30일 찰스 1세를 대역죄로 사형에 처했어요. 유럽 국가 중에서는 처음으로 재판을 거쳐 왕을 사형에 처한 일이었기에 유럽 전역은 당시 큰 충격에 빠졌답니다.
◇지나친 금욕주의 반발… 왕 다시 데려오다
찰스 1세가 죽은 뒤 많은 사람이 "크롬웰이 잉글랜드 왕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크롬웰은 거절했어요.
하지만 크롬웰은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고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잔혹한 통치를 이어가면서 점차 민심을 잃었어요. 1649년 아일랜드의 드로이다를 점령한 뒤 이곳 주민 2000여 명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지르는 끔찍한 학살도 서슴지 않았어요. 또 지나친 금욕 생활을 요구한 것도 사람들이 등을 돌리게 하였어요. 크롬웰은 형형색색으로 빛나던 스테인드글라스는 검은 유리로 바꾸도록 하고 찬송가를 제외한 모든 노래를 부를 수 없게 했어요. 어떤 운동 경기도 열릴 수 없게 되었고 남·여 모두 검은 옷만 입도록 강요했답니다.
1658년 크롬웰이 말라리아로 죽자 폭정에 시달렸던 영국 시민들은 다시 영국을 왕국으로 돌리기로 결심했어요. 1660년 영국 시민들은 크롬웰을 피해 프랑스로 도망가 있던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데려와 왕으로 즉위시키면서 영국은 11년 만에 왕국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