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아하! 이 인물] 두 아들과 아내에 대한 그리움… '황소'라는 걸작 그려냈죠

입력 : 2016.06.20 03:09

이중섭

이중섭
이중섭
'황소'(1953~1954) 등 이중섭 절정기 대표 걸작들이 전시되는 '이중섭-백년의 신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오는 10월 3일까지 열려요.

이중섭이 두 아들에게 쓴 편지도 전시돼 아버지 이중섭의 삶을 보여주지요. 멋진 아들 태현(첫째 아들)아. 편지 고마워요. 덕분에 아빠는 더욱 더 힘을 내어 열심히 그림을 그려요. (중략) 아빠가 나중에 한 달쯤 지나서… 도쿄에 가면 꼭 자전거 사줄게요. 둘째 아들 태성에게도 이중섭은 애정 어린 편지를 남겼어요. 태성이가 늘 엄마 어깨를 주물러 준다면서요. 정말 착한 아이네요. 아빠는 태성이의 상냥한 그 마음에 감격했어요. 앞으로 한 달만 있으면 아빠가 도쿄에 가서 자전거 사줄게요. 건강하게 엄마랑 태현이 형하고 사이좋게 아빠를 기다려주세요. 아빠.

동생과 형이 싸우지 않도록 편지를 두 장씩 쓴 게 인상적이지요. 자전거를 사주겠다는 내용도 똑같이 반복되는군요. 그런데 이것들은 이중섭이 한창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절 쓴 편지래요. 천재성을 타고났지만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이중섭은 어떤 인물일까요?

지금으로부터 꼬박 100년 전인 1916년, 이중섭은 지금의 북한 땅인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에 살던 부유한 농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어요. 고구려 고분에 들어가 벽화를 감상하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그 영향으로 신비스러우면서도 민족적인 화풍을 갖게 되었어요. 이중섭이 평생에 걸쳐 그린 소도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소재예요. 그는 몇 날 며칠이고 소를 살펴본 뒤 그렸는데, 하루는 소도둑으로 의심받아 경찰에 신고되는 소동도 겪었지요. 예술적 재능이 남달랐던 이중섭은 민족학교인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미대에 유학을 떠났어요. 그곳에서 일본인 아내 마사코 여사를 만났지요. 이중섭은 아내에게 '이남덕'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이중섭은 대표작‘황소’(1953~1954)에서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우리 민족의 상징인 소가 울부짖는 모습을 그렸어요.
이중섭은 대표작‘황소’(1953~1954)에서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우리 민족의 상징인 소가 울부짖는 모습을 그렸어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제공
부유했던 이중섭의 집안은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풍비박산이 났어요. 북한 정권에 재산을 몰수당한 뒤, 그의 가족들은 부산, 통영, 제주 등을 떠다니면서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어요. 이중섭은 사랑하는 이남덕 여사와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그림으로 성공하기 위해 애썼어요. 그가 힘겨웠던 삶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흰소'(1954) '황소'를 비롯한 수많은 걸작이 탄생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전쟁 전후 경제가 어려웠던 우리나라에서 이중섭의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어요. 절망에 빠진 이중섭은 영양실조와 병으로 40세의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가고 말아요. 하지만 이중섭과 마사코 여사의 사랑 이야기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랍니다. 95세의 마사코 여사는 아직도 이중섭 선생님을 사모하면서 일본에 생존해 계시기 때문이지요.

마사코 여사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답니다. "한국에선 당신 그림들이 덕수궁에 모여 관람객을 맞는다지요. 언젠가 세상 사람들이 당신 그림을 알아볼 거라는 내 믿음은 옳았어요. 그래도 초등학생까지 다 아는 '국민화가'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지요. 이토록 기쁠 수가요. 당신과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조현재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동양대 공공인재대학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