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클래식 따라잡기] 라 트라비아타·카르멘도 첫 공연 땐 '앙코르' 못 받았대요

입력 : 2016.06.10 03:10

[처음엔 실패했던 걸작]

신분 뛰어넘은 사랑 '라 트라비아타', 여주인공이 남자 배신하는 '카르멘'
당시 충격적인 내용으로 외면받아…
실패해도 다른 이 조언 듣고 개선해 더 큰 호응 받는 명작 됐어요

어린이 여러분은 부모님께 꾸지람보다 이왕이면 칭찬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하지요? 작곡가들도 예외는 아니랍니다. 힘들게 한 음, 한 음 정성 들여 쓴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 작곡가라면 누구나 청중의 박수갈채를 받고 싶어 하지만 모든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지는 않아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최고의 걸작 중 처음 발표됐을 때 크게 실패를 했던 작품도 많다는 사실이에요.

거장도 실패하고 마음고생 했어요

악성(樂聖·성인에 이를 정도로 뛰어난 음악가)으로 불리는 베토벤은 영웅, 운명, 합창 등 9가지 교향곡을 지어 잘 알려져 있지요. 위대한 작곡가인 베토벤은 단 한 곡의 오페라를 남겼어요. 제목이 '피델리오'인데, 1805년 11월에 처음 공연됐죠. 이 시기는 프랑스 나폴레옹군이 베토벤이 활동하던 오스트리아 빈을 침공했던 때였어요. 전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청중 대부분은 점령군인 프랑스의 군인들이었죠. 독일어 가사를 몰랐던 그들은 공연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한 차례 실패 후 베토벤은 작품을 고쳐서 이듬해 봄에 다시 무대에 올렸지만, 작곡가 자신도 오페라의 대본을 개작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뿐 아니라 비평계 반응도 좋지 않았어요. 1814년 5월 시간이 한참 지난 후 '피델리오'가 다시 공연되었을 때는 작곡가와 청중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성공을 거둘 수 있었죠. '피델리오'는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중요한 작품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답니다.

한평생을 오페라 작곡에 바쳤던 이탈리아의 주세페 베르디도 성공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어요. 그의 대표작 '라 트라비아타'는 비올레타와 알프레도의 슬픈 사랑 이야기죠. 우리나라에서는 '춘희'라는 이름으로 공연된 적 있어요. 이 작품은 베네치아에서 1853년 처음으로 무대에서 공개되었는데, 당시에는 청중 반응이 좋지 않았어요. 첫째로 당시의 귀족들에게는 극 중 귀족 남성이 신분 차이가 나는 여성과 사랑을 나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둘째로 폐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여주인공 비올레타의 배역을 지나치게 뚱뚱한 소프라노가 맡아 극과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었어요. 실패 원인을 분석한 베르디는 작품을 일부 수정하고, 여주인공의 성격을 고려해 배역에 좀 더 알맞은 소프라노를 섭외했어요. 다음 해 다시 공연한 결과는 성공이었습니다. 그 후 '라 트라비아타'는 전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오페라로 남았죠.

음악 애호가들이 사랑하는 오페라 '카르멘'도 첫 공연 때 실패했던 작품이에요. 소설가 메리메의 작품을 바탕으로 오페라 '카르멘'을 만든 프랑스의 작곡가 조르주 비제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천재성을 인정받았어요. 비제가 작곡한 '카르멘'은 1875년 파리 오페라 코미크극장에서 초연(初演·첫 번째로 공연하는 것)되었어요. 아름다운 멜로디와 극적인 긴박감이 이 작품의 매력이지요. 그러나 등장하는 여주인공인 집시 여인 카르멘의 개성 때문에 실패를 하고 맙니다. 작품 속에서 카르멘은 거칠고 폭력적이며 싸움을 좋아하고, 사랑하던 남자를 배신하는 '나쁜 여자'로 그려졌어요. 당시 오페라 극장은 고상한 귀족들이 만나는 장소였어요. 관객인 귀족들이 보기에 이 오페라는 무섭고 당혹스러운 작품이었던 셈이죠.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작품을 성공시키기 위해 온 힘을 쏟았던 작곡가 비제가 실패로 마음의 병을 얻어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에요. 그가 사망한 후 '카르멘'은 점차 인기를 얻었어요. 시대가 바뀌면서 여주인공 카르멘의 매력을 알아주는 관객들이 나타났기 때문이지요. 현재 '카르멘'은 세계 어느 극장에서나 공연하는 오페라 대표작이랍니다.

작품 보완하고, 조언 듣는 겸손한 자세로 극복했어요

차이콥스키의 유명한 발레 음악 '백조의 호수'도 '곡이 발레 감상을 방해한다'는 악평을 받았던 작품이에요. '백조의 호수'는 요정의 딸이 아름다운 백조로 변하여 왕자와 만나게 된다는 줄거리지요. 이 줄거리에 흥미를 가진 차이콥스키는 1877년 이 작품을 초연했는데, 청중에게 외면받았어요. 멋진 멜로디와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무용수의 움직임을 감상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죠. 당시의 발레 음악은 발레리나의 움직임을 돋보이게 반주하는 것이 보통이었거든요. 그 후 마음이 약했던 차이콥스키는 한때 다시는 발레 음악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지만 마음을 돌려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등의 걸작을 만들었어요.

지난 2012년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 공연을 캐나다의 한 발레단이 열고 있어요. ‘백조의 호수’는 첫 공연 때 실패를 겪었지만 현재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명작이지요.
지난 2012년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 공연을 캐나다의 한 발레단이 열고 있어요. ‘백조의 호수’는 첫 공연 때 실패를 겪었지만 현재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명작이지요. /Larry Sy / Flickr

1878년 차이콥스키는 또 한 차례 실패를 겪어요. 그가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가 하마터면 연주되지 못할 뻔했던 거죠. 차이콥스키는 이 곡을 완성하고 연주를 부탁하려고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레오폴드 아우어를 찾아갔는데 "너무 어려워서 연주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차이콥스키는 포기하지 않고 초연해 줄 다른 연주자를 찾았어요. 결국 3년 만인 1881년 독일의 아돌프 브로드스키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빈에서 이 곡을 처음으로 연주하게 되었죠. 처음에는 지나치게 어려운 바이올린의 기교에 청중이 당황했지만, 점차 작곡가 특유의 매력을 이해하게 되면서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도 인기를 얻었어요. 공연을 거절했던 레오폴드 아우어도 마음을 바꿔 이 작품을 공연 무대에 올렸다고 하지요.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실패하면서 고생을 한 작곡가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니 몇 가지 공통점이 있네요. 큰 시련이 와도 좌절하지 않았다는 점,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작품을 보완하려고 노력했다는 점.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겸손'의 자세이지요. 어느 분야에서나 꼭 필요한 덕목들입니다.


 

김주영·피아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