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이명옥의 명작 따라잡기] 조수 쓴 화가들, '공동 제작' 사실 숨기지 않았어요

입력 : 2016.06.03 03:10

[화가와 조수]

17세기 유명 화가 루벤스, 반다이크 등 도제 화가들과 자신의 공방에서 함께 작업
데이미언 허스트 등 현대 미술 작가, 남 도움 받지만 소수에 불과해

최근 가수 겸 화가로 활동하는 조영남씨가 다른 사람이 대신 그린 그림을 팔았다는 논란에 휘말렸어요. 조영남씨는 "조수가 대신 그림을 그리는 것이 미술계 관행"이라고 주장해 더 큰 논란을 일으켰지요. '조수가 대신 그리는 것이 관행'이라는 말이 과연 사실일까요?

대부분 작가는 직접 그림을 그리고, 창작을 통해 기쁨과 자부심을 느낀답니다. 그래서 조영남씨 말에 많은 작가가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요. 하지만 서양 미술사에서 조수가 필요한 일도 있었어요. 대략 중세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에서는 조수를 써서 그림을 그리는 관습이 있었다고 해요.

17세기 유럽 최고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도 조수들과 협력해 그림을 그렸지요.

작품1~4
작품1은 프랑스 왕 앙리 4세와 왕비 마리 드메디시스가 프랑스 리옹에서 처음 만났던 날의 장면을 그린 작품이에요. 마리 왕비는 당시 인기 화가 루벤스에게 남편 앙리 4세와 자신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모두 24점 그려달라고 주문했어요. 루벤스가 마리 왕비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 여신으로, 앙리 4세를 신들의 제왕 제우스로 그린 이 그림은 '마리 드메디시스의 생애 연작' 중 하나랍니다.

기록을 보면 루벤스는 마리 왕비가 주문한 연작을 그릴 때 공방에서 여러 동료 화가, 조수, 도제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다고 해요. 프랑스 미술사학자 질 네레에 따르면, 루벤스 공방을 방문했던 덴마크 의사 오토 스페를링은 루벤스의 조수들이 일하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해요. '많은 젊은 화가가 각자 캔버스에 작업하고 있었다. 그 그림들은 루벤스가 먼저 초크로 드로잉하고 색을 지시해둔 작품으로 마무리는 그가 직접 했다. 이 그림들은 루벤스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루벤스는 주문이 밀려들자 빨리 그림을 완성하려고 협력 방식을 썼지만 혼자서 그린 그림도 있어요. 작품2는 루벤스가 두 번째 아내 헬레나 푸르망과 자식들을 혼자 직접 그린 그림이에요.

루벤스는 공동 제작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어요. 또 많이 붓질한 그림은 비싸게, 적게 붓질한 그림은 싸게 팔았기 때문에 주문자들도 불만을 갖지 않았다고 해요. 당시 루벤스 같은 저명 작가의 공방은 무명 화가나 예비 화가들에게 필수 코스였어요. 루벤스는 단지 주문량을 늘리려는 목적으로 공방을 운영한 것은 아니었어요. 공방에서는 다른 화가들과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요. 당시 화가들은 인물, 풍경, 동물, 꽃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잘 그렸어요. 루벤스의 공방에서 인물화 전문 도제 화가로 활약하다 독립해서 성공한 대표적 인물로는 안토니 반다이크가 있어요. 반다이크는 루벤스 공방에서 인물화 실력을 인정받은 뒤 영국으로 건너가 찰스 1세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궁정 화가가 되었어요.

작품3은 갑옷을 입은 영국 왕 찰스 1세가 지휘봉을 손에 쥐고 말을 탄 모습을 반다이크가 그린 것이에요. 반다이크의 초상화는 왕의 권위와 품격, 부유함을 세련되고 우아한 화풍으로 표현해 왕족·귀족 초상화의 표본이 되었지요. 반다이크는 루벤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초상화 거장으로 평가받는답니다. 그러나 이후 19세기 들어 유명한 화가 공방에 조수로 들어가 그림을 함께 그리는 일은 드물어졌어요.

오늘날에도 일부 작가는 조수의 도움을 받으며 그림을 그려요. 작품4는 영국의 스타 작가 데이미언 허스트의 대표작 '스폿 페인팅(Spot Painting)' 연작 중 한 점이에요. 허스트는 작품을 직접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자랑해요. 데이미언 허스트는 작품의 콘셉트(concept·개념)만 관객에게 잘 전달된다면 누가 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해요. 그림 속 색색 물방울은 알약을 뜻해요. 인간은 오래 살려고 약을 먹지요. 그러나 아무리 효능이 좋은 약일지라도 죽음을 막지 못해요. 색이 화려한 알약은 삶의 욕망을 상징해요.

또한 약의 중독성을 경고하는 의미도 담고 있어요. 색깔이 아름답고 화려한 독버섯처럼 약이 건강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이죠. 허스트는 작가의 붓질이 별 의미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똑같은 원 모양의 알약을 색깔만 달리한 뒤 조수들이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그리도록 시켰어요. 허스트의 작품처럼 조수가 대신 그렸을 때는 관객이나 수집가가 '작가의 붓질보다 개념이 중요하다'는 작품 의도에 공감해야만 한답니다.

조영남씨의 해명에 반박하는 작가들은 "현대 미술계에서 조수를 쓰는 사람은 거대한 작품을 제작하는 유명 작가로, 5명 중 1명에 불과하다"고 말해요. 작가 대부분은 직접 창작 활동을 할 수밖에 없고요. 그러니 '관행적으로 미술 작가는 모두 조수를 쓴다'는 조씨 말에 많은 작가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죠.


이명옥 사비나 미술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