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부잣집선 며느리·데릴사위로 부족한 노동력 채웠죠

입력 : 2016.05.09 03:26

옥저, 여자가 열 살 되면 결혼 약속
남편 있는 시댁 가서 살림살이 배워… 성인 되면 정식으로 결혼
고구려, 귀족·지배층 집안에 남자가 사위로 들어가 일손 거들어
평민은 자유로운 연애결혼 했대요

주민등록 인구 통계를 바탕으로 결혼 연령층 남녀(남성 28~35세, 여성 26~33세)의 비율을 살펴봤더니, 남자 6명 중 한 명은 짝이 없을 만큼 성비 불균형이 심각하대요.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이삼십 년 전 남아 선호 사상이 팽배해 아들을 골라 낳았던 탓이 커요. 과거의 잘못된 사회 분위기가 현재의 비극을 낳은 셈이죠. 오늘은 역사 속 독특한 혼인 풍습에 대해 알아볼게요. 이 풍습들이 왜 생겼을지 함께 생각해보아요.

옥저 '민며느리'는 비녀 안 꽂은 며느리

기원전 2세기 이전 지금의 함경남도 해안 지대와 두만강 유역 일대에 걸쳐 있던 '옥저'라는 나라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울음을 터뜨렸어요.

"아버지, 저 그 집에 안 가면 안 돼요? 우리 식구들과 이곳에서 살고 싶어요." "이미 그 집 아들과 너를 혼인시키기로 약속했다. 그러니 미리 그 집으로 가서 생활해야지. 우리 옥저의 전통 풍습도 그러하고." 이 옥저 여자아이는 불과 열 살의 나이에 신랑,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있는 시댁에 가서 집안일을 배우게 됐어요. 이런 옥저의 혼인 풍습을 '민며느리제'라고 불러요. 민며느리란 장차 며느리를 삼으려고 '쪽 찌지 않은 민머리(비녀를 꽂지 않은 머리)'일 때 데려와서 기른 여자아이란 뜻이에요.

기사 관련 일러스트
그림=이혁

'위략'이라는 역사책에는 옥저의 민며느리제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어요. '여자아이가 열 살이 되면 혼인을 약속하고, 신랑 집에서는 그 여자를 맞이하여 성인이 될 때까지 길러 아내로 삼는다. 성인이 되면 다시 여자 집으로 돌려보낸다. 여자 집에서는 돈을 요구하는데, 지불이 끝나면 신랑 집으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하면 여자가 너무 어린 나이부터 시집 눈치를 보며 살게 되는 것 아니냐고요? 딸을 민며느리로 보내는 집은 보통 형편이 무척 어려웠다고 해요. 반대로 민며느리를 데려오는 집은 재산이 많아 아이를 한 명 더 기를 수 있었고, 늘어난 노동력을 토대로 살림살이를 유지했죠.

고구려 '데릴사위제' 처갓집은 부유층

민며느리제의 반대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데릴사위제'도 있었어요. 데릴사위제란 처가(신부의 집)에서 딸과 사위를 함께 데리고 사는 혼인 풍속이지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어요.

'고구려에서는 남녀 간에 혼담이 이루어지면 여자 집에서 본채 뒤편에 '서옥'이라 불리는 작은 집을 짓는다. 날이 저물어 돈과 폐물을 준비한 신랑이 신부 집에 이르러 신부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청한다. 신부 집에서는 두세 번 청을 받은 후 신랑을 서옥으로 안내하여 신부와 함께 지내도록 한다. 이후 이 부부가 아이를 낳고, 아이가 장성하면 세 가족이 남자네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사위와 딸이 지내는 작은 집이 '서옥'이므로 고구려의 데릴사위제는 '서옥제'라고도 한답니다. 주로 데릴사위를 들이는 집안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고구려 귀족·지배층·부유층이었다고 해요. 데릴사위제 또한 옥저의 민며느리제처럼 경제력은 있지만 노동력은 부족했던 집에서 혼인을 통해 일할 사람을 얻었던 제도였죠.

삼국시대 이후로도 데릴사위제는 여러 모습으로 변형되며 오랜 기간 이어져 내려왔어요. 어린 소년이 처가에서 자라며 잡일을 하다가, 성년이 되어 결혼을 한 후에도 계속 여자 집에서 살면서 그 집의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었죠. 고려시대에는 딸만 있는 집안에서 집안의 가계를 잇기 위해서 사위를 양자처럼 맞이하는 풍속도 있었다고 전해져요. 조선시대에는 가계를 잇는 것과는 관계없이 결혼 직후 일정 기간 처가살이를 하는 사위들이 있었고요.

현대에도 흔히 쓰는 '장가(丈家)간다'는 말은 '장인(丈人)의 집으로 간다'는 뜻으로, 고구려 데릴사위제의 흔적이 남아 있는 말이랍니다.

고려는 연애결혼, 조선은 중매결혼

반면 고구려의 일반 평민들은 경제적인 이유를 따지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답니다. '수서 동이전'에는 평범한 고구려 사람의 경우 자유로운 연애결혼을 했다는 대목이 나와요. '고구려인의 혼인은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곧 혼인이 이루어지고, 남자의 집에서는 여자의 집에 선물로 돼지와 술만 보낼 뿐이다.'

고려에서는 비교적 자유연애가 가능했고, 부모님의 허락은 결혼하기 전에만 받으면 됐다고 해요. 그러나 유교 문화가 뿌리내린 조선 중기 이후로는 혼인이 개인 간 언약이 아닌 집안끼리의 계약이라는 성격이 강해졌어요. 이때부터 중매결혼이 성행하고 '혼인은 집안이 서로 만나는 것'이라는 성격이 강조됐지요.


 

지호진·어린이 역사전문 저술가 |